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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과 바이든의 레토릭 수업

by Editor M
윤여정의 레토릭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특히 이 상은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아서 더 기쁘고 영광스럽네요.

Every award is meaningful but this one, especially recognized by British people known as very snobbish people and they approved me as a good actor, so I’m very very privileged and happy.


배우 윤여정이 2021년 4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한 수상 소감은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스노비시’(snobbish)란 ‘속물적인’, ‘고상한 체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지만, 윤여정은 ‘반어법’(아이러니, irony)이라는 수사법을 써서 참석자들과 시청자들을 휘어잡았다. ‘대영제국’의 우월감에 젖어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였으니 자신의 연기가 얼마나 훌륭했느냐는 뜻이다. 반어법은 속마음에 있는 내용을 겉으로는 반대로 표현하는 레토릭이다.


윤여정의 영국 아카데미 수상과 수상 소감은 약 2주 뒤 열릴 세계 최고의 인기 영화제인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의 예고이면서, 동시에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구사할 수준 높은 레토릭의 전조이기도 했다. 수상 소감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rhetorike)에서 제시한 세 가지 장르의 담화 중 과시용 또는 의식용(儀式用) 연설에 속하는 것으로 각종 행사나 의식에서 칭찬 또는 비판을 하거나, 청중을 즐겁게 하고 감화시키기 위한 연설이다.


윤여정은 미국에서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시상식 직후 ‘2021 오스카 최고·최악의 순간’이라는 기사에서 윤여정의 수상 소감을 최고의 수상 소감(Best all-around acceptance speech)으로 꼽았다. 아카데미의 밤, 그녀는 레토릭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뭐라고 했을까?


먼저 그녀는 수상 소감의 첫머리, 즉 서론(exordium)에서 세계적인 인기배우이자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가 시상자로 나선 점을 십분 활용해 청중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어모은다.


브래드 피트씨! 마침내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군요. 반가워요.
Mr. Brad Pitt! finally, Nice to meet you.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끄는 돈호법으로 연설을 시작한 윤여정은 이후 감성적 호소(파토스)와 윤리적 호소(에토스)에 집중한다. 유럽 사람들은 자신을 '여영'이나 '유정'이라고 잘못 불렀지만 오늘 밤은 모두 용서할 거라고 말하면서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관대함을 부각하고 미국 청중과 유대감을 쌓는다. 이는 또 ‘당신네 미국인들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거지?’ 라는 속뜻을 내비치며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추어올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적 설득의 3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화자의 성품과 관련이 있다고 한 ‘에토스’(ethos)를 발휘한 것이다.


윤여정은 이어서 이 연설의 골자라 할 수 있는 진술 및 논증 단계에서는 파토스(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를 불어일으키는데 주력한다.


저는 경쟁을 믿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길 수 있겠어요? 그녀의 연기를 지금까지 쭉 지켜봐 왔는데. 모든 후보자, 우리 다섯 명의 후보자 모두는 각각 다른 영화에서 승리자예요. 우리는 각기 다른 역할을 연기했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거예요.

I don't believe in competition. How can I win Glenn Close? win over Glenn Close? I have been watching her so many performances, so this is just... all the nominees, five nominees, we are the winner for the different movies. We played different roles, so we cannot compete with each other.


윤여정은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길 수 있겠어요?”라는 강력한 수사의문문(erotema)으로 말문을 연 뒤 ‘경쟁은 없다’라는 논지를 펼쳐나가며 청중들의 파토스(pathos)를 자극한다. 수상 소감 영상에 삽입된 화면을 보면 윤여정과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였던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윤여정) 너무 좋아”(I love her)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윤여정이 “우리 사이에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해요”(We cannot compete each other)라고 말한 직후다. 윤여정의 레토릭이 청중을 완벽하게 파토스로 설득했다는 증거다.


또한 ‘경쟁은 없다’를 논증하는 과정에서는 생략삼단논법도 구사됐다. 잘 알다시피 삼단논법이란 두 가지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전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 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레토릭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생략삼단논법은 대전제를 생략한다. 윤여정의 논증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전제 모든 경쟁자는 하나의(동일한) 종목(영화)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소전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자들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연기했다

결 론 그러므로 우리 후보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수사학은 ‘과학적 증명’의 영역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의 영역을 다루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니 같은 영화에 출연해서 같은 부문상을 놓고 경쟁하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은 너그럽게 담아두시라.


그녀의 레토릭은 음성과 운율을 맞출 정도의 수준이었다. 영어 원문을 봐야 도드라지게 알 수 있긴 하지만, 윤여정은 병행법(parallelism)과 음조(euphony)에도 신경을 썼다.


‘win Glen Close? win over Glen Close?’, ‘all the nominees, five nominees’, ‘different movies, different roles’ ‘we are... we played... we cannot...’ 보다시피 ‘글렌 클로즈’, ‘노미니스’, ‘디퍼런트’, ‘위 아’ / ‘위 플레이드’ / ‘위 캔 낫’처럼 음절이나 구문을 효과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문장에 운율과 리듬을 부여하여 청중들의 귀에 잘 들린다.


윤여정은 곧이어 대표적인 레토릭 기교라 할 수 있는 은유(metaphor)로써 문장을 마치면서 결론으로 넘어간다.


오늘 밤 저는 조금 운이 좋아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보다 조금 더 운이 좋은 거지요. 어쩌면 이 수상이 한국 배우에 대한 ‘미국식 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onight I'm here is that just because of a little bit of luck, I think. Maybe luckier than you. And also maybe.. Is that an American hospitality for the Korean actor? I'm not sure. Thank you so much.


자신의 오스카 수상을 미국식 ‘환대’(hospitality)라며 유머러스하게 비유했다. 올리비에 르불에 따르면 “웃음은 그 자체가 설득 수단이다. 청중을 웃김으로써 웃음은 듣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들을 결속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기지(esprit)와 유머는 수사법이다.”


연륜이 물씬 배어나는 회색 머리칼에 수수해 ‘보이는’ 블랙 드레스(마마르 할림 2017F/W)를 입은(이역시 비주얼 수사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동양 여인의 아카데미 수상 소감은 거의 완벽한 기억술과 -본인은 버벅댔다며 부끄러워했지만, 너무 완벽하지 않은 연설 그것마저도 이 연설의 에토스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발표술로써 잘 짜인 한 편의 멋진 레토릭이었다.




바이든의 레토릭


이번에는 ‘정치적 레토릭’(연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취임사를 살펴보자. ‘MAGA’ 즉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Great America Again)로 대표되는 트럼프의 수사(修辭)를 물리치고 정권 교체를 이룬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즐겨 쓰는 레토릭의 특징은 삼절문(三節文)과 반복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기원전 47년 로마의 카이사르가 적들을 물리친 뒤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에 쓰여 있었다는 유명한 라틴어 경구(maxim)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부터 프랑스 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박애’(Liberte, Egalite, Fraternite), 미국 독립선언서의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에 이르기까지 (특히 음조와 운율을 맞춘) 삼절문은 역사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레토릭이다. 오죽하면 요즘도 ‘~하는 3가지 이유/방법’이라는 식으로 꾸준히 쓰일까. 아마도 3이란 숫자는 인간의 뉴런이나 시냅스의 구조와 필연적인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바이든은 취임사에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인용하면서-금언(maxim)의 인용 또한 주요한 수사법이다- 삼절문을 사용한 것을 포함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빈번히 삼절문과 반복, 병행의 레토릭을 구사했다.


나의 모든 영혼이 오늘 이 안에 있습니다. 오늘 그때와 같은 1월의 날에 나의 모든 영혼이 이 안에 있습니다. 미국을 하나로 묶는 것.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 그리고 국가를 통합하는 것.

My whole soul is in it. Today, on this January day, my whole soul is in this. Bringing America together. Uniting our people. And uniting our nation.


우리는 민주주의가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배웠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지금 민주주의는 승리했습니다.

We've learned again that democracy is precious. Democracy is fragile. At this hour, my friends, democracy has prevailed.


위험과 가능성의 겨울에 우리가 할 일이 많습니다. 고칠 게 많습니다. 복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치료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건설해야 할 게 많습니다. 그리고 얻을 것도 많습니다.

we have much to do in this winter of peril and significant possibilities, much to repair, much to restore, much to heal, much to build, and much to gain.


이러한 반복과 병행의 수사법은 특히 대중연설에서 빛을 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빈번한 동어반복은 문장으로는 부적절하지만, 논쟁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중연설 연설가들이 자주 사용한다고 하였다. 전달에는 그런 기법들이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이든은 또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 연설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 -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십시오”-에서 썼던 레토릭인 반복치환법(antimetabole)도 연설 후반부에 활용한다.


우리는 힘의 본보기가 아니라, 본보기의 힘으로 이끌 것입니다.

We will lead not merely by the example of our power but by the power of our example.


삼절문과 반복법, 병렬법을 즐겨 쓰는 바이든의 레토릭은 2021년 5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첫 한미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국 측,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긴밀하게 협력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갑시다.

I’m looking forward to working closely with you and your team as we expand and strengthen our efforts to shape the future together. And I mean that literally — to shape the future together.


바이든 대통령은 모두 발언을 마무리하며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to shape future together)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다. 또 삼성과 SK, 현대, LG의 경영자들을 일으켜 세워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 그 기업의 경영자들이 오신 거로 알고 있는데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I understand the executives of those companies are here. Would you please stand up? (Applause.)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


바이든 대통령은 어찌 보면 의례적인 인사말인 ‘땡큐’마저도 반복함으로써 레토릭의 힘을 인정한 것이다.


“단어든 소리든 구든 문장이든 생각이든 반복은 필수적인 수사학 전략이다. 다음의 옛 격언은 메시지 전달의 핵심을 짚고 있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말하고, 말하고, 무엇을 말했는지 말하라’” (리처드 토이,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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