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다니엘 Oct 25. 2024

독일 정신문화의 수도 바이마르.

독일의 안동..?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함부르크의 새벽. 역 주변은 어디나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하기에 꽤 경계했다. 바이마르에 빨리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졸려서 꾸벅꾸벅 조는데, 저번 주에 면접을 봤던 직장에서 합격했다며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괴팅엔에서 지역열차로 갈아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이 보이는데, 이곳이 독일에서 극우 정당이 활개를 치는 튀링엔인가. 처음 오는 곳이라 다른 여행보다 조금 더 경계를 한다. 독일 역사도 참으로 기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독일 문화의 정수인 바이마르가 속한 튀링엔 주가 독일의 극우 정당 AfD의 지지도가 최초로 다수당이 된 점이겠다.


물론 나치도 이런 독일의 동쪽에서 성공을 거둬 정권을 획득했으니, 90년이 지난 지금 그게 꼭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다. 물론 바이마르는 그런 색채가 덜하겠지만, 서독 지역이 아닌만큼 신변에 조심해야할 것이다. 어쩌면 사소한 인종차별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건 구 동독 지역의 경제가 통일 이후에 망가졌던 게 제일 큰 이유겠지만. 이런 걸 고려하면 독일이 통일된 게 꼭 좋은 일이었을까.

크게 다른 점은 없는데, 눈에 띄는 건 주변에 산업이라곤 두 시간을 달려도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바이에른이나 바덴뷔르템베르크에도 시골을 달릴 때면, 그런 일이 왕왕 있긴 한데, 아직 내가 대도시 Erfurt나 Jena 쪽을 지나가지 않아서일까. 놀고 있는 땅과 인구밀도가 아주 적어 보이고, 대규모 풍력터빈, Wind Farm이 눈에 띈다. 정작 여기서 전기를 많이 생산해서 남부에 보내고 있으니, 이쪽 사람들은 여러모로 그동안의 모든 정책에 반감을 품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해본다.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독일 계몽주의, 정신문화의 수도, 괴테와 실러를 품은 곳이자 독일의 정신이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안동쯤이 되지 않을까. 리스트도 이곳에 있었고, 니체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뭐 니체야 이미 그 때 목숨만 붙어있기만 했긴 하다만, 아무튼 그의 동생이 기념관을 만든 곳도 여기.


날씨는 역시 오락가락한다. 바로 오는 버스를 타고, 괴테 광장에 내리니 괴테와 실러의 동상이 날 반긴다. 그야말로 독일 문화의 수도가 아닌가. 먼저 바이마르 공화국에 관련한 박물관에 들러 왜 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1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독일, 아니 프로이센의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임하며 공백이 된 독일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수도 베를린은 치안도 불안했지만, 그보다도 패망한 프로이센의 수도였기에 새로운 권력을 위한 정치 행사를 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서남부 독일의 정치 거물도 동의하고, 기존의 정치군사력을 갖고 있던 프로이센이 동의할만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그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곳이 바이마르다. 지금에야 바이마르가 동쪽에 치우친 것 같지만, 예전 독일 영토가 지금의 폴란드 영토를 많이 차지했던 걸 보면 이 위치가 국토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에 더해 괴테와 실러는 프로이센이 아닌 그야말로 독일, 도이치 민족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렇게 이곳에서 독일의 헌법,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진다. 이를 주도한 건 사회민주당의 당수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헌법의 문건…!

독일의 헌법은 당시 제일 잘 만들어진 헌법이었는데, 이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시작된 공화국에서 인류 최악의 지도자가 탄생한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히틀러는 정권 잡기 전에 1933년 전에 40번이나 방문했고, 최초의 나치 수용소가 이곳 주변에 생긴 것인 참으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지금 생각해도 획기적인 건 그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했다는 점. 그리고 독일의 평생 교육 제도 등이 이때 기반했음을 알게 된다. 그 평생 교육 과목 중 하나로, 괴테 파우스트가 있었던 건 흥미롭기도 했다. 그야말로 독일인에게 괴테의 문학은 성경과도 같은 존재라고 느꼈달까.


이외에도 많은 정책을 펼치며 국민들을 위한 국가를 지향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0년대 후반, 경제 대공황 이후 실업자가 양산되며 국민적 지지를 잃게 된다. 가난해진 국민들은 모두 이를 당시 정권의 탓으로 돌렸고, 이와 더불어 전쟁패배의 원인과 기존의 정권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정치 프로패건다화하며 나치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지금의 독일 정치에 극우정당이 판을 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곳의 중심지가 이 바이마르가 있는 튀링엔이라는 점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전시에서의 말을 인용해본다.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위대한 헌법만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Democracy is neither unconditional nor enduring in all circumstances. Every democracy is vulnerable, even when it has a very good constitution.”


“Demokratie ist nicht voraussetzungslos ud unter allen Umstaenden gesichert. Jede Demokratie bleibt angreifbar, selbst wenn sie mit einer sehr guten Verfassung ausgestattet ist.”




이제 식사를 하려는데, 이젠 적어도 돈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는다거나 걱정을 해야 하는 등의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름대로 자축하며 와인을 한 잔 시켰다. 그렇다고 이전에도 굶고 다닌 건 아니지만, 심경의 큰 변화가 생겼달까.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식사를 마치고 괴테의 생가를 찾았다. 사실 이 모든 여행의 제일 큰 목적은 이것이었다. 보통의 생가는 컬렉션이 빈약한 게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미 생에 큰 성공을 거뒀기에 그의 생가는 생가라기보다도 저택에 가까웠고, 그 컬렉션은 어마어마했다. 그가 고대 그리스 로마문화를 동경했기에 많은 그리스풍의 조각과 이태리식의 그림 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 화려함과 반대로, 그가 실제로 작업하는 곳은 굉장히 소박했는데, 실제로 많은 시간과 지고지난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은 아무것도 없는 게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파우스트가 완성되었던 그 방들을 둘러보고 나니 참으로 기뻤다. 이제 진정으로 독일에서 방문하고 싶은 곳은 이제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곳은 괴테가 살아있을 때 많은 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했는데, 이런 배경이 바이마르가 이후 독일 아르누보 (Jugendstil)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공화국이 탄생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파우스트를 집필한 공간
괴테의 저택


역사적인 공간들을 지나 이제 괴테가 사랑했던 공원을 향했다. 뮌헨의 영국정원과도 비슷한데, 당시 이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대공과 괴테가 조성한 공원이다. 괴테의 대저택도 대공이 괴테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참 선물도 통이 크다. 뭐 괴테가 이 조그만 나라의 재상이기도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괴테가 살던 공원 내 다른 집도 둘러봤다.


작은 시내가 흐르는 공원 내에 있는 집도 참으로 좋다. 큰 산은 없지만, 시내가 흐르는 곳에 집이 있는 것은 마치 안동의 병산서원처럼 느껴진다. 이곳이 우리 기준으로 보면 또 명당이 아니겠는가.

저녁은 다시금 괴테의 대저택 앞에 있는 튀링엔 전통 식당을 찾았다. 완전히 독일인만 있는 자리에 동양인이 오니, 몇몇 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유창하진 않지만, 독일어로 주문하니 사람들도 경계를 푸는 듯했다. 아니 경계를 풀기보다는 독일어를 할 줄 아니, 적어도 험담은 하지 못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이 와중에 독일어는 당케밖에 하지 못하는 불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와 주문에 애를 먹길래 도와주었다. 은퇴한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왔는데, 젊은 나이에도 영어를 잘 못하는 자녀들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들은 이곳 바로 앞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를 찾아왔더랬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유대인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봤다. 그들은 프랑스에 인접한 벨기에 출신이라고 했다. 프라이부르크 산다고 하니, Fribourg라며 잘 안다고 한다 (뭘 말해도 프랑스식으로 받아들이는 프렌치 스피커들...) 은퇴한 군인 아저씨는 내가 해군이라고 하니 좋아했는데, 몇 번 건배까지 하니 친밀하다고 느꼈는지, 떠날 때 ‘So long, friend.’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어쩌면 짧게나마 프랑스어로 샹떼나 살뤼 등의 말을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가 참 귄터 그라스와 비슷하게 생겼다.




다음날. 다시금 공원을 지났다. 가을 아침에 맞는 신선한 공기가 아주 좋았다. 울긋불긋한 낙엽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제 이렇게 좋은 가을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좀 있으면 우중충한 겨울이 되겠지. 그래도 이 좋은 계절에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 받았는가. 사실 독일에 온 이래 이때마다 학기가 시작될 때라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금 기차를 타고 이제 Erfurt로 이동한다. 이동하는데 저 멀리 보이는 탑이 유대인 수용소가 있던 곳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다. 수용소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일 정신의 수도 바로 앞에서 수만의 사람을 학살했던 게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치는 괴테를 본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괴테 생가도 리모델링했고, 바이마르에서도 전당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건물 중 하나는 지금 박물관 내지는 쇼핑몰로 운영되고 있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의 생가
나치 전당대회 건물들..

Erfurt로 향한다. 튀링엔의 주도이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구시가지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곳이 튀링엔이 맞는가 할 정도로. 성당의 규모는 정말 압도적이었는데, 근래 본 성당 중 제일 인상 깊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기자기한 도시가 좋았다. 반년 전쯤 갔던 Würzburg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언덕 위의 성 내지는 옛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 시내를 볼 수 있는 전망도 인상적이었다.


짧게 시내를 둘러보고, 튀링엔의 소세지를 먹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웬일인지 오늘은 연착이 거의 없이 아주 수월하게 향하고 있다. 재밌는 건 10분 늦는다고 하며, 미안하다는 방송에 사람들은 10분밖에 안 늦는다며 좋아라 하는데, 독일 바깥 사람들이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와는 참으로 다를 것이라는 점에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에도 바다가 있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