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진실

무의식의 살인자 완결

by 정준영

*이야기에 나오는 이름과 단체, 사건 등은 모두 창작의 산물입니다.


양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수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가설을 설명했다. 양필은 골몰한 표정으로 갑수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갑수가 말을 마치자 양필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숙 씨는 제 아내가 맞고 그 병원들이 아내 건물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래서요?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죠. 증거도 없이 사람을 연쇄살인마로 몰아도 되나요?"

예상한 답변이었다. 갑수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긴 뒤 자리를 뜨며 말했다.

“우연이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긴 쉽지 않죠. 이런 건 ‘계획된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는 갑수. 양필은 잠시 자신의 책상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들고 점잖지만 강한 어조로 경고한다.


"오늘 일은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갑수는 양필이 진범일 수 있단 사실을 부장에겐 알리지 않았다. 일단 표면적으로 양필이 혐의를 전면 부인했기 때문에 다른 각도로 취재가 더 이뤄져야 했다.


갑수는 규홍과 약속을 잡았다. 서울청 건너편 북촌 계단집에서 해산물과 소주를 먹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경찰과 진지하게 사건을 논의한 적은 처음이었다.


규홍은 내색은 안 했지만 갑수로부터의 연락이 반가웠다. 미처 덜 주워 먹은 콩고물이 남았을까 내심 기대를 품고 있던 터였다.

갑수는 규홍에게 자신의 가설을 설명했다. 규홍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처음 듣기엔 황당했지만, 규홍 생각에도 우연치곤 영 수상쩍은 사건이었다. 여러모로 따져본 결과 규홍은 갑수의 가설을 증명해 볼 만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고 이미 재판으로 넘어간 사건을 경찰이 임의로 뒤엎을 순 없었다. 그건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일이다. 언론이 새 판을 짜준다면 모를까.


그래서 규홍은 갑수에게 보도를 부추겼다. 다시 여론이 타오르면 경찰이 나서고, 아니면 그만두면 될 일이다. 갑수 입장에선 위험부담이 큰 일이지만 술은 인간의 뇌를 지배해 합리적 의사를 막는다. 얼큰하게 취한 갑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호기롭게 기사 발제를 만들어 부장에게 전송한 뒤 곯아떨어졌다.


‘무의식의 살인자, 진범은 졸피뎀 처방한 정신과 의사?’

다음 날 새벽 서울의 한 빌라촌. 독거노인이 흉기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머리카락 몇 개와 지문을 확보했다.

뉴스를 본 갑수는 양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양필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병원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규홍을 통해 알아본 결과 이번 사건도 종전 사건과 양상이 거의 동일했다.


갑수는 양필의 범죄를 확신했다. 하지만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에게 꼬리가 잡힌 만큼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발각될 확률이 커질 터였다. 그 정도로 살인 충동을 참기 힘든가?


그나저나 전날 규홍과의 술자리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장은 “소설은 문학상에 응모하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제야 술김에 발제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규홍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갑수의 말대로 양필이 진범이라면 이번 사건은 너무 무모했다. 그게 아니라면 모방 범죄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현장이 똑같을 순 없었다. 경찰의 촉이 말해주고 있었다. 동일범이 확실했다.


일단 현장에서 발견된 DNA 증거의 감식 결과를 보고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저지른 범죄라면 또 애먼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해야 승진가도가 열릴 것이었다. 양필이 진범이라면 반드시 검거해야 한다. 하지만 양필의 행적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며칠 뒤 드디어 규홍의 서울청 사무실로 국과수 분석 결과가 전달됐다. 결과지를 살핀 규홍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이내 엷은 미소가 떴다. 꺼져가던 기회의 불씨를 간신히 부여잡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얽힌 실타래를 힘들게 풀 필요는 없다. 정 안 되면 가위로 잘라낸 뒤 이어 붙이면 될 일이다.'


잠시 후 모 방송사에서 ‘경찰이 국과수 분석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했다’는 내용의 온라인 단독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기자는 이번 사건을 ‘무의식의 살인마’ 사건과 연결 지었다. 누가 봐도 규홍이 준 정보였다.


'기껏 양필에 대한 정보를 귀띔해 줬더니 정작 중요한 정보는 다른 언론사에 흘리다니...'


갑수는 규홍이 괘씸했다. 게다가 규홍은 갑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화기가 꺼진 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하고 있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긴 뒤 큰 실수라도 했던 걸까?


부장은 이번에도 단독을 해오라며 닦달이었지만 갑수는 경찰 취재가 안 돼 그럭저럭한 내용으로만 기사를 쓰고 있었다. 저녁 6시쯤, 정신없이 기사를 마감하고 보니 부재중 전화가 몇 건 와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꽤 급한 용건이었던지 상대방은 문자 메시지까지 남겼다.


발신자는 자신이 어느 방송국의 기자이며, 같은 업계 종사자끼리 런 일로 불쑥 연락드려 죄송하다면서 갑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낯이 익었다. 낮에 국과수 결과 관련 온라인 단독보도를 한 기자의 이름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정 기자님의 DNA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혹시 이번 살인사건의 범인이신가요? 문자 확인하시면 답장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유명세를 타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긴다고 생각하며 답장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두어 시간 뒤 갑수에게 ‘장난을 친’ 기자가 뉴스에 나왔다. 오늘 난 살인사건 보도였다. 그런데 리포트 제목이 심상치 않다.


[단독] 살인사건 현장서 현직 기자 DNA 발견…연쇄살인사건 진범 의혹


보도본부 직원들이 '대체 어느 공장의 누구냐'고 웅성거리며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뉴스는 "몽유병 괴담 사건 단독 보도를 이어온 모 방송사 기자 정 모 씨의 머리카락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갑수 회사의 건물 외경과 함께 갑수의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해 내보냈다.


뒤이어 경찰 정복을 입은 규홍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규홍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모 기자를 용의자로 전환했으며, 그가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습니다."


술렁이는 보도본부. 정적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정 씨라…. 우리 회사에서 이거 보도한 정 씨는 갑수뿐인데?”

같은 시각, 라미도 구치소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라미는 모자이크 된 모습만으로도 뉴스 속 인물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매일 저녁 그토록 간절하게 TV에서 만나길 바랐던 남자였으니까.


뉴스를 본 수감자들은 입을 모아 갑수를 욕했다. 졸피뎀이니 몽유병이니 특종을 쏟아낸 것이 결국 자기 범죄 감추기 위한 속임수였던 거냐며. 그 옆에서 라미는 고개를 떨구고 숨죽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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