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름인 만큼 역시 인터넷 검색 소득은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법인 등기에 적힌 미숙의 주소지였다. 문제는 주소지가 한두 곳이 아닌 데다, 일부는 아파트 이름까지만 적혀있고 동과 호수는 생략돼 있었단 점이다. 부장은 갑수의 취재를 굳이 말리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인력을 따로 떼주진 않았다.
갑수는 혼자서 차근차근 취재하기로 했다. 처음 몇 군데 집에서 만난 사람들은 단순 세입자들이었다. 그들은 미숙을 집주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전세 계약서를 쓸 때 딱 한 번 봤다고 한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두 곳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였다. 사설 보안업체가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갑수는 두 아파트에 사는 지인을 수소문한 뒤 지인 방문을 핑계로 지하주차장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미숙이 사는 동과 호수를 몰랐다.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을 방도는 없다.
노가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주차된 차량에 적힌 핸드폰 번호를 일일이 저장한 뒤, 카카오톡에 뜨는 이름으로 미숙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일부 주민이 수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다행히 며칠 동안 별 탈은 없었다. 하지만 미숙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딘가 낯이 익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갑수는 은밀히 남자의 뒤를 밟았다. 갑수는 남자의 얼굴이 라미에게 수면제를 처방해 준 정신과 전문의, 양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벤츠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저 의사가 왜 여기에 있지?’
갑수는 남자의 차 번호판을 메모했다. 나중에 차량 앞유리에 적힌 전화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연락처를 알면 그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양필이 맞더라도 별로 이상할 건 없다. 돈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강남의 대장 아파트였으니까.
잠시 차에서 생각에 빠져있던 갑수. 그때 남자의 벤츠가 돌아왔다. 갑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태연한 척 남자를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갑수는 남자가 버튼을 누르길 기다렸다가 그보다 높은 층을 눌렀다. 남자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갑수는 문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귀를 기울였다. 왼쪽 복도에서 도어록 소리가 났다. 아파트는 한 층에 두 집뿐이었다. 갑수는 집 호수를 메모했다.
갑수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벤츠 앞유리에 놓인 전화번호를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잠시 후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사진이 등장했다. 갑수는 프로필을 눌러 친구가 설정한 이름을 확인한다.
‘서양필’
역시 그는 양필이 맞았다. 그다음 갑수는 아파트 1층으로 갔다. 갑수가 들어간 호수의 우편함을 들춰봤더니 마침 전기료 고지서가 있었다. 그 순간 갑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미숙'
뜻밖의 사실에 갑수는 진정되지 않았다. 양필이 들어간 집의 소유주는 미숙이었다. 둘은 부부지간인가? 그렇다면 양필이 살인사건의 배후인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갑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 길로 퇴근했다.
갑수는 동네 호프집 야외 테이블에서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하나의 가설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연쇄살인마 서양필’
진범은 양필이다. 하지만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로서 대놓고 살인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양필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을 불면증 환자, 그중에서도 졸피뎀 의존성이 높은 사람들로 골랐다. 그중 한 명이 라미였다.
하지만 꼭두각시를 전부 자기 병원의 환자 중에서 택할 순 없었다. 꼬리가 길면 잡힐 위험이 커지니까. 사건 현장을 지역적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양필은 아내 미숙을 대표이사로 유령회사를 여럿 만든 뒤 법인 명의로 건물을 사들였다. 이후 병원을 골라 입점시킨 다음 적당한 불면증 환자를 물색했을 것이다. 건물주 지위를 이용해 직원과 친해진 뒤 떠보거나 아니면 매수했을 수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먹잇감을 정한 뒤엔 DNA를 수집했을 것이다. 체모는 화장실만 따라다녀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지문도 어렵지 않다. 실리콘으로 지문을 떠서 출퇴근 기록을 조작하는 방법은 고전이 된 지 오래다.
희생자들을 혼자 사는 빈민층 위주로 고른 이유는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일 테다. 며칠 눈에 띄지 않아도 찾아 나설 이 없고, 죽더라도 슬퍼할 사람 없는 소외계층.
그런데 사건 현장에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수술실 복장 차림을 했을지도 모른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덧신을 신었다면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은 점도 설명이 된다. 범행 후에는 준비해 간 환자들의 체모를 뿌리고 지문을 찍어댔을 것이다. 경찰이 DNA 증거를 입수해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토록.
하지만 양필의 계획은 두 모녀 사건에서 어그러졌다. 양필은 딸이 집에 함께 사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우발적으로 딸을 죽였다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온몸을 꽁꽁 싸맨 덕분에 딸의 저항에도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가슴을 쓸어내렸겠지.
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사건이 이슈가 된 것이다. 두 모녀 사건 이후 유사 살인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일 테다. 양필은 사건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결론에 다다른 갑수는 펜을 테이블에 쾅하고 내려놓은 뒤 맥주를 들이켰다. 탄산이 주는 청량감이 손끝 발끝 말초신경까지 짜릿하게 퍼졌다.
그 순간 갑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라미였다.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갑수의 마음엔 라미가 크게 자리 잡았다. 삼십 대 중반에 찾아온 묘한 느낌은 곧 사랑으로 발전했다.
갑수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람 감정이란 다 그렇지 않나? 당장이라도 라미에게 답장을 써서 놀라게 하고 싶었다. 드디어 진범을 찾아냈으며, 정체는 양필이었다고. 라미는 물론이고 다른 피고인들 전부 누명을 벗게 될 것이다. 갑수는 영화 속 영웅이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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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이 났지만 신중해야 했다. 갑수는 양필을 직접 만나 묻기로 했다. 양필의 병원에 진료 예약을 걸었다. 전화 취재는 양필에게 빠져나갈 틈을 줄 수 있었다. 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죠?"
예약날의 병원. 양필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갑수를 맞는다. 갑수를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갑수는 책상에 앉아 두 손을 올려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