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서 양필을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라미 측이 ‘당시 기억나지 않는다’라며 일관되게 진술하는 데다 졸피뎀 부작용이 진짜든 아니든 여론의 의혹이 큰 만큼 라미의 담당 의사를 불러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취지다.
그런데 과연 양필의 증언은 어느 쪽에 유리할까? 검찰과 변호인은 모두 유불리 판단에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몽유병 환자가 맨 정신인 사람을 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시간은 흘러 라미의 공판일이 돌아왔다. 이 날따라 재판 방청객이 부쩍 많았다. 양필은 방청석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자 몇몇이 자신을 알아본 것 같았지만 다행히 법정에선 재판 내용을 받아 적는 외에 취재 일체는 금지된다.
양필은 한국에 언론사가 이 정도로 많은 지 몰랐다. 60~70명은 족히 돼 보였다. 자리가 모자라 바닥까지 기자들이 꽉 들어찼다.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양필의 신경을 더 긁었다.
양필은 의문이었다. 이 수많은 언론사가 똑같은 재판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지. 자신에게 영화 어벤저스의 타노스 장갑이 있다면 손가락을 서너 번은 퉁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론사는 손에 꼽을 정도만 있으면 적당해 보였다.
어느새 양필의 증인신문 순서였다. 양필은 증인석에 앉아 오른손을 들고 증인 선서를 했다. 이후 검사가 신문을 시작했다.
검사: 정신과 전문의인 증인은 불면증을 호소하는 피고인을 수년간 진료하고 약을 처방해 주었죠?
양필: 네 그렇습니다.
검사: 피고인에게 정량을 넘는 졸피뎀을 처방한 적이 있습니까?
양필: 없습니다. 제출된 진료 기록에 적혀 있을 텐데요.
검사: 진료 기록이 사후에 수정됐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양필: 전혀요. 그럴 이유가 없죠.
검사: 그렇다면 피고인이 약의 부작용이나 이상 증상을 호소한 적이 있습니까?
양필: 역시 진료 기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는 검사.
검사: 졸피뎀을 복용하는 환자가 몽유병을 겪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시선을 떨구는 양필.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연다.
양필: 의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하진 않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방청석의 타자 소리가 우레처럼 커진다. 타타타타다다닥.
검사: 부작용은 꼭 약물을 오남용 할 때만 발생하나요?
양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검사: 정량을 복용해도 부작용을 겪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양필: 뭐... 부작용은 복용량과 상관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달라질 뿐.
타자 소리가 다시 커진다.
검사: 그렇다면 피고인에게도 부작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요?
양필: 그렇지만 제가 진료한 바로는 김라미 환자가 부작용을 겪었던 기억은 없군요.
그 순간, 라미가 양필을 응시하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미는 분명 양필에게 몽유병 비슷한 증상에 대해 상담한 적 있다. 양필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걸까?
라미는 이 사실을 변호인에게 귀띔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걱정이었다. 어쩌면 양필의 거짓말은 자신에 대한 배려일지도 몰랐다. 일단 라미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이후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변호사: 졸피뎀의 부작용 가운데 몽유병이 있다는 것이 의학계의 중론입니까?
양필: 그런 연구 결과가 일부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변호사: 그렇다면 불면증 환자가 몽유병 상태에서 맨 정신인 성인을 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양필: 그걸 어찌 제가...
이때 검사가 끼어든다.
검사: 재판장님, 변호인은 지금 증인에게 무리한 추측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변호인: 정신과 전문의로서의 전문성에 입각한 의견을 묻는 것뿐입니다.
판사: 인정합니다. 증인은 답하세요.
양필은 난처하다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연다.
양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순 없지만 아예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겠습니다.
취재진은 실망한 눈치였다. 양필의 증언은 가능성으로 시작해 가능성으로 끝났다. 이번 재판에서 뽑을 헤드라인은 딱히 없었다. 라미가 걱정할 만한 기사는 나오지 않았고, 양필의 병원엔 더 이상 기자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양필의 고도의 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판이 거듭될수록 점차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어갔다. 대중은 경찰·검찰 수사단계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될 때 가장 열광한다. 아직 사건이 베일에 가려있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다. 법정에서 가려지는 실체적인 진실엔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갑수의 회사 회의에서도 “이쯤 하자”라는 얘기가 나왔다. 마침 정치권에서 다른 이슈가 터져서 사회의 모든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갑수는 영 기분이 찜찜했다. 사건의 핵심에 전혀 다가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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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는 자신에 대한 더 이상 기사가 나오지 않자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치소 TV에 자신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세상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갑수였다. 마이크를 들고 자신에 대해 가타부타 떠들어대는 갑수의 모습이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라미는 이 모든 일이 갑수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존재는 갑수뿐인지도 몰랐다. 라미는 갑수가 TV에 나와 “이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습니다”라며 보도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그가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수는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라미는 매일 저녁 TV를 올려다보다가 실망하며 돌아서길 반복했다. 이러다가 곧 판결이 선고될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라미는 교도관에게 펜과 종이를 부탁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자신을 면회하러 온 변호사 손에 들려 보냈다. 하지만 변호사는 편지를 갑수에게 직접 전달하는 대신 사진을 찍어 휴대전화로 전송했다. 무료 변론을 제안했던 게 슬슬 후회되던 차였다.
“카톡! 카톡!”
갑수의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라미의 변호사 연락처였다.
‘단독 기삿거리인가?’
갑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폰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이 라미의 손편지라는 걸 알고선 감정이 혼란스러워졌다. 편지라면, 당연히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이리라 짐작했는데 라미는 오히려 자신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자신을 구해달라며.
인터넷매체에 유튜버까지 너도나도 기자임을 자처하는 족속이 넘쳐나는 요즘, 기사 한 건이 지니는 가치는 과연 얼마일까? 갑수는 본인이 기자이면서도 여태껏 기사의 무게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사명감이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동정인지 연민인지, 아니면 연정인지 모르는 감정도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