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 재판은 인기가 급상승했다. 공판이 열리는 날 북부지법 법정은 취재진과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라미의 변호인도 한 명에서 세 명으로 늘었다. 흙수저였던 라미에게도 변변한 변호사 한 명쯤 살 돈은 있었다. 증권사 연봉이 꽤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견 로펌의 변호사 한 명을 선임해 대응해 왔다.
그런데 방송 이후 유명 법무법인에서 무료 변론 제안이 쇄도했다. 라미의 형편으로는 꿈도 못 꿀 대형 로펌들이었다. 아마 좋은 홍보 기회라 판단했을 테다. 라미는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로펌을 선택했다. 심지어 파트너 변호사까지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라미는 곧 억울함을 벗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허튼 기대였을까? 변호사 머릿수는 늘었어도 공판은 맴돌기만 했다.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졸피뎀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이기 때문에 몽유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하지만 몽유병 상태로 누군가를 제압해 목숨을 끊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무엇보다 피고인들에게 몽유병 현상이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라미는 본인에게 몽유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자다 일어났을 때 손발이 더러워져 있거나 상처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자신에게 수면제를 처방해 준 양필에게 딱 한 번 얘기한 적 있다. 변호인들에겐 아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잠을 자는 도중 사람을 죽이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에 대한 괴담이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규홍은 이 부분이 참 답답했다. 이슈가 더 발전되려면 피고인들의 졸피뎀 처방 기록이나 진료 기록을 살펴봐야 했는데, 병원에선 의료기록은 개인정보라며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괴담을 이유로 영장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규홍은 꾀를 냈다. 갑수에게 피의자들이 다닌 정신과병원 목록을 슬쩍 넘겼다. 언론은 경찰과 달랐다. 취재에 영장 따위는 필요 없다. 기자가 병원을 취재한 결과 뭐라도 기사가 보도되면, 규홍은 기사를 근거로 영장을 신청할 계획이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이다.
갑수는 후배들과 나눠 정신과병원을 방문했지만 역시나 병원에선 취재를 거부했다. 수습기자가 하루 종일 로비에서 뻗치며 애걸복걸하자 그제야 원장 한 명이 혀를 내두르며 은밀히 피고인 한 명의 진료기록을 설명해 줬다. 하지만 해당 피고인은 졸피뎀을 정량 처방받았고, 몽유병 부작용에 대한 기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갑수는 피고인 측 변호사들을 취재해 보기로 했다. 피고인들의 법률대리인은 대부분 국선변호인이었다. 가진 재산이 없던 탓이다. 하지만 국선변호인들은 워낙 맡은 사건이 많은 데다 당시 증거가 명확했던 나머지 검사와 딱히 공방을 벌이지 않았다. 이미 패소판결이 확정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변호사에겐 비밀유지의무가 있기에 취재에 마음대로 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한 국선변호인이 갑수에게 회신했다.
“의뢰인이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군요. 병원에서도 몽유병이라고 했다는데, 원하면 보도하셔도 된답니다. 전 이게 바람직한 건지 판단은 잘 안 서는데, 이미 재판이 유죄로 기운 마당이라 이판사판인 것 같네요.”
로또복권 1등에 당첨 돼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지금과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갑수는 생각했다. ‘피고인 중 한 명에게 몽유병이 있음이 확인됐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나가자 여론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들끓었다. 급기야 졸피뎀 처방을 중단해야 한다는 청원까지 등장했다.
기자들은 이제 양필의 병원으로 몰려갔다. 라미가 졸피뎀을 정량 처방받았는지, 부작용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모두 환자의 의료정보라 밝힐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양필이 졸피뎀을 과다 처방했을지도 모른다’며 추측성 기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양필은 졸지에 ‘불법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의사가 되고 말았다.
양필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마음 같아선 라미의 진료기록을 기자들 면상에 던진 뒤 허심탄회하게 인터뷰하고 싶었다. 양필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과량을 처방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미의 진료 기록에도 부작용 관련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될 거 같았다. 변호사 친구에게 물었더니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지내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양필은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곧 양필에게 억울함을 토로할 기회가 생겼다. 검찰과 변호인이 양필을 증인으로 신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