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릉~ 달칵!
“거기 은정이네 집이죠?”
“여긴 내 집이다.”
“네?? 거기 은정이네 집 아닌가요?”
“내 집에서 은정이가 살고 있다.”
핸드폰이 없던 80년대,
친구들이 집으로 전화해 나를 찾을 때면 거기 은정이네 집이냐고 먼저 묻는 게 인사였다.
집에 아빠가 계실 때 받게 되면 아빠는 장난 삼아 “내 집”이라고 말씀하셨다.
친정 집을 우리 집이라고 생각 못한 건 아빠의 “내 집” 선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이와 살면서 일하랴, 아이 돌보랴. 집안 치우랴 정신없이 바쁠 때,
그이가 가끔 일찍 와서 집안 청소를 다 해 놓고 나서 뿌듯한 얼굴로
“내가 청소도 해놓고, 빨래도 개 놓고, 윤서도 다 씻겨 놓았지! 잘했지?”라고
내게 칭찬을 바라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그이가 내게 물었었다.
내가 해 준 말은 야박하게도 칭찬이 아니었다.
"내 집에서 고생이 많네. 내 공간 치워주고, 내 아이 돌봐주느라.”
같이 살면서 다 내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게 진짜 큰 선심 쓰는 것처럼 하지말고,
주인의식 좀 가지라고 한 말이었다.
재경이가 만약 남편감을 데리고 오면 물어볼 말 중 하나는
“그래. 집안일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인데
만약
“재경이 잘 돕겠습니다.” 라고 할 경우는 탈락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다 제 일입니다.” 가 베스트 대답이라는 걸 재경이도 알고 있다. (미리 문제를 발설하면 안되는데)
재경과 윤서가 전기를 켜놓고 나가버리거나, 보일러 돌아가는데 문을 다 열어놓은 경우
큰 소리로 외친다.
“이것들아.. 내 집에서 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펑펑 쓸래?”라고 스크루지영감마냥 소리지른다.
그렇다.. 그이가 간 뒤로 이 집은 내 명의로 되어 있어서 이제 내 집이다.
내 집에서 얹혀살던 재경이가 30년 만에 드디어 독립이다.
충청도나 강원도 어디쯤 시골에서 살고 싶은 게 꿈이라던 재경은 진짜 충청도 시골로 독립을 했다.
교사도 싫다. 공무원도 싫다던 재경은 퇴근 시간 정확하고, 육아휴직 완벽하고, 복지시설이 끝내주는 회사에 근무해서 취미생활 가득가득 하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했는데! 지가 원하던 곳으로 갔다.
작년부터 재경의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독립한다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시원 섭섭 아련 서운 미련, 그 어딘가에 감정이 맴돌아 딱 표현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부모교육 할 때면 민들레와 소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도 자신의 씨앗을 멀리멀리 보내야 자신도 그 씨앗도 건강하다는 걸 안다는 예를 들었다. 물론 나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대학도 목포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려고 했고, 졸업 후에는 더 먼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다 친정에서 가장 먼 곳인 시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면서 더더 먼 곳으로 독립하지 못해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오는 거 같았다.
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멀리멀리 보내줄 거라고 한 쪽 마음에 늘 결심과 다짐을 했었다.
그러다 알았다. 그이가 떠나고, 작년에 커다란 돈사고를 겪고 나서야, 재경에게 얼마나 큰 의지를 하고 있고, 하고 싶었는지 나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된 거다.
병원에 있을 때 재경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내 아픔을 재경이가 좀 알아주었음 하는 그 양가감정이 있다는 걸 알고 부끄러웠다. '부모는 부모다워야지' 라는 내가 가진 생각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삶은 나를 1년 더 기다려준 거다.. 내가 부모답고 멋지게 재경이를 보낼 시간을 말이다.
민들레가 키를 높이 키워 씨앗을 멀리 보내는 것처럼..
소나무가 솔방울 사이에 든 솔씨를 멀리 보내기 위해
날이 좋은 날, 바람이 잘 부는 날 활짝 그 몸을 여는 시기를 정확하게 아는 것처럼 말이다.
어제 재경이가 짐을 싸서 현관을 나서는데, 울지 않고 좀 멋지게 인사했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독립한 아이들이 집에 오면, 손님 같은 기분이 든다고 먼저 경험한 친구들이 내게 말해준다.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가끔 오는 손님 말이다.
그래서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집청소도 해야 한다고.
올 때 반갑지만 가는 뒤통수는 더 반가울 거라고 내게 말해준다.
1년간 키를 높이고 몸을 활짝 열어 두는 연습을 해서인지
난 울지도 않고, 아주 쿨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오늘까지 빈 방은 아직 못 들여다보고 있긴 하다.
핸드폰만 있고 집전화는 없지만,
만약 재경이 친구가 전화해서
"거기 재경이네 집이죠?"라고 묻는다면
"재경이가 살았던 집인데...."라고 하겠지.
내 집에 이제 나만의 공간이 더 늘어나고 있다.
1호가 독립했으니 2호의 독립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