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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Choi 최다은 Jun 13. 2024

침팬지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서아프리카에 사는 침팬지들은 딱딱한 견과류를 돌로 깨어 먹는다. 견과의 껍데기를 깨려면 우선 비교적 평평한 돌 위에 견과를 올려놓은 다음 다른 돌로 내리쳐야 한다. 서아프리카 침팬지가 언제부터 이런 방법을 습득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지역에 사는 침팬지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행동이다.

어린 침팬지는 부모에게서 이 기술을 배운다. 그러나 부모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엄마 침팬지는 자식이 지켜보는 가운데 줄곧 견과를 깨서 먹을 뿐 자식에게 설명하거나 자식의 손을 쥐고 깨는 방법을 훈련시키지 않는다. 새끼 침팬지는 그저 엄마의 행동을 관찰하며 스스로 터득해 간다. 첫 관문은 평평한 돌로 주워 견과를 그 위에 올려놓으려 애쓴다. 그런 아이를 엄마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 잘못을 지적하거나 바로잡지 않는다. 그저 새끼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줄 뿐이다. 무한한 참을성을 품고(주).


침팬지의 인내심이 인간의 인내심보다 훨씬 우월해서일까? 어떻게 빨리 습득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말이지? 아이의 무수한 시행착오를 스스로 체득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있는 힘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이를 갖기 전에 나는 생명체를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이 매우 두렵고 막연해서 아이를 키우는 선배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아이를 낳기가 무서워, 과연 철없는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 선배언니의 말이 귀에 콕 박혀 잊히지 않는다. 


"아이는 잘 키우기 위해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낳는 것이야, 사랑을 주기 위해 나에게 온 선물이야 다은아"




맞아.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이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 이유는 참된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많은 문제가 비롯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런 부모를 만나 존재로써 사랑을 받고 어떤 이는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작부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양동이'가 있다고 하는데 각자의 크기만큼 그 양동이가 채워져야 그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의 양동이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그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 사랑받지 못함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은 오랜 시간 우리를 괴롭힌다. 이 결핍은 결국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장되니까.



나는 사실 존재로써 사랑을 받은 어쩌면 매우 특혜 받은(?) 사람이다. 어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 사회에 나오고 마흔 언저리 나이가 들어가니 내가 자라온 가정환경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양육에 대한 시선도 나는 그런 무조건적인 인정과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부터 찾으려는 노력도, 나 자신을 올바르게 세워가려는 의지도 모두 건강한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 또한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로 사랑받은 사람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다음 스텝을 밟는다. "내가 이렇게 가치가 있는 사람인데(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굳게 신뢰하고 있으니) 세상에 어떻게 잘 쓰이면 좋을까?" 스스로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 존재를 세상에 잘 쓰이게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존재로써 사랑받은 사람의 일종의 의무와 같은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꽃다운 아이들이 무기력함으로, 성적문제로, 기타 다른 이유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뉴스를 접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세상에 올바르게 잘 쓰임 받기 위한 그 의지를 만들 수 없도록 어른들이 이미 어린아이 때부터 수많은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나는 아이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는 인정의 언어, 격려의 언어를 전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내가 늘 들었던 말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엄마 딸로 와줘서 고마워"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혹여나 너를 손가락질해도 엄마는 항상 내편이야"


누군가에게는 이런 오그라들 수 있는, 하기 힘든 말을 자연스럽게 잘하는 엄마이다. 내가 잘나서 지혜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엄마의 마음대로 이끄는 다른 엄마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왜 아이를 자기 욕심대로 대할까?' 라며 속으로 비난한 것도 참 부끄러울 정도로 나 또한 그런 모습도 충분히 많고 설사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특혜를 갚아야 할 의무감이 있다. 이상하리 만큼 내 주변의 누군가가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 사랑의 양동이가 비어있는 것이 느껴질 때면 나의 넘치는 사랑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한다.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나는 넘치게 받았으니까 나누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는 하나도 어렵지 않은 사랑 전달이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어도 안 되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줄 수 있는 힘은, 그 무한한 인내심은 비효율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침팬지보다 똑똑한 인간은 그런 바보 같은 마음을 침팬지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엄마인 나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그 아이 존재로써 단지 사랑을 주기 위해 있어주는 존재일 뿐이라고, 그런 사랑을 받은 아이는 기다려 주면 분명 자신의 때에 잘 쓰임 받기 위한 고민을 할 것이라고. 그런 아이는 결코 엇나가는 인생을 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주) 숙론, 최재천, 2024, 김영사


Dana Choi, 최다은의 브런치북을 연재합니다.


월       [나도 궁금해 진짜 진짜 이야기]

화. 토  [일상 속 사유 그 반짝임]

수       [WEAR, 새로운 나를 입다]

목       [엄마도 노력할게!]

금       [읽고 쓰는 것은 나의 기쁨]

일       [사랑하는 나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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