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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미모미 MomiMomi Apr 21. 2020

경청과 이우환 화백의 Dialogue

진짜와 가짜 고수를 구별하는 법


누군가 물었다. 진짜 고수와 가짜 고수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과거에 보았던 나름 어느 분야의 고수라고 알려진 두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한 사람은 고수라고 스스로 알려서 유명해진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타인들이 고수라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의 만남에서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몇 시간의 대화로도 두 사람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다.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들의 듣기 차이’ 경청’에 있었다.


출처. 한국경제


스스로 고수라고 알리며 많은 추종자와 재산을 자랑삼는 것이 메인 레퍼토리인 전자의 자칭 고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진리인 냥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 과히 고수 급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사람이 통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대화나 소통은 부재했다. 만남 장소에서 퍼지던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고수의 수많은 말이 뒤섞인 채, 그가 남긴 복잡한 문장 가운데 한 문장이 씁쓸하게 지나쳤다.

물론 나는 이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세상은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엎드린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우르르 몰려든다.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다. 세상의 이런 단면을 영리하게 꿰뚫고 머리만 비상한 가짜 고수가 판을 짜고 틈을 비집고 들어올 자리를 내주는구나 싶었다. 고수의 말에 대한 진실 여부는 더 이상 나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나와는 절대 지향점이 맞지 않다는 것. 이후 조용히 자칭 고수의 SNS 이웃을 끊었다.




자신은 고수가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는 타칭 고수와의 만남은 시종일관 ‘귀를 기울여 들음’그 자체였다. 전자의 자칭 고수가 대화를 하면서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며, 노트북에 많은 창을 띄우고 랜선 너머로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던 모습과 대비가 되었다.


진짜 고수는 그 흔한 휴대폰도 대화의 자리에 꺼내지 않았다. 상대방의 대화에만 온전히 기울이겠다는 마음의 표시였다.
 
고수의 말을 듣기 위해 가진 자리였는데 신기하게도 고수는 계속 듣고 질문하고, 말은 내가 하고 있었다. 고수는 종이에 내가 한 말을 적어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의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마련하기 위해 내 입장이 되어보며 며칠을 숙고한 것 같았다. 고수는 나의 생각을 조용히 듣고 나서 plan A, B, C, D를 조언했다.


고수의 조언은 목소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척추가 흔들릴 정도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플랜 A, B, C, D 과정 하나하나가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도전이었다. 실행에는 많은 장벽이 있었지만 모든 실행 과정이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전자의 고수는 성공을 지향하기 위한 자신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했고, 후자의 고수는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상대를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로 이끌기 위한 성장을 제안했다.

고수는 어떤 사람일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느 한 분야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아직 고수의 경지를 가보지 못했지만 거기엔 분명 그 분야의 본질이 자리하고 있다. 


본질의 시작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라고 인정하는 겸손이다.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새로운 지혜들이 들어올 틈이 생긴다. 고수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 부분을 채워나간 열린 귀를 가지고 있었기에 범인들이 오르지 못한 그 경지에 도착했다. 

경청은 단순히 고수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상대를 존중하며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 경청의 사전적 정의이다. 주의하며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말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것을 온전히 품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새 하얀 캔버스처럼 침묵의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아이들과 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내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으리라는 갈급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많은 후회와 반성이 찾아온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귀 기울이지 않았기에 아직 고수의 경지는커녕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나 보다. 남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소리에도 경청하지 않은 바쁜 시간 때문에 본질에서 멀어져 주위만 맴도는 삶을 살았나 보다.

경청을 시작해보고 싶다. 나의 소리, 세상의 진실한 소리를 온 마음 다해 들어보고 싶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열기 위해 나의 마음에 정적이 필요하다. 그 정적을 도와주는 작품 한 점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우환 화백의 <대화 Dialogue>라는 작품이다.

이우환 Dialogue,  출처. 서울옥션


작가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커다란 흰 여백 위에 점 하나를 찍어 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점 하나지만, 찍힌 점과 찍히지 않은 여백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이 점이 존재감을 갖고 가장 좋은 자리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여백을 잘 살펴야 한다. 여백은 정적이 감도는 순도 100프로의 백지여야 한다.

화가는 하나의 점이 최선의 자리를 잡기 위해 캔버스를 새 하얀색으로 정성스럽게 칠한다. 경청할 채비를 하고 점 하나를 온전히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심혈을 기울여 점 하나를 백지 위에 채워나간다. 가장 적당한 위치에 점 하나를 찍기 위해 백발의 노장은 90도 허리를 숙이고 자신뿐만 아니라 무한의 세계를 끌어와 점 하나에 담는다. 점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또다시 몇 달 동안 이 작업을 반복한다. 어떤 점은 백지 상단에 어떤 점은 하단에 또는 중앙에 자리 잡는다. 각자의 위치에 그려진 점들은 마주한 백지와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작품의 조화를 찾아 나간다.

“점은 그림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인식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표식이다.”

이우환 화백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말로 도화지에 무수한 점을 찍기보다는 여백이라는 경청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는 것에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끝날 때 즈음 나라는 인생의 작품에 산만한 점들만 가득할지, 아니면 이우환 화백의 작품처럼 여백의 미가 강렬한 점 몇 개가 남을지는 오늘 하루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사진 출처. 서울옥션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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