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계절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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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27일의 산책 -


레미콘 트럭이 산책로를 서행 중이었다. 사람이 밟아서 형성된 좁고 정겨운 산책로를 자동차 바퀴가 매일 꾸준히 망가뜨리고 있다. 공원 공사 차량이 산책로를 임시 도로처럼 쓰는 탓에 산책로 위의 잔디와 풀이 뽑히고 흙이 깎였다. 우둘투둘한 타이어 자국이 연한 흙에 도장처럼 찍혔다. 납작한 풀로 직조된 고급 카펫 같던 산책로가 벅벅 지워졌다.


오후 3시에 공원에 왔다. 날씨가 엄청 맑고 따뜻했다. 도톰한 겨울 마스크 대신 얇은 마스크를 꼈다. 벗겨진 흙길을 달리는 트럭이 흙먼지를 담배 연기처럼 날렸다. 헐렁한 마스크 속으로 먼지 냄새가 들어왔다.


새들이 부럽다. 불편한 장소에서 재빠르게 훨훨 도망칠 수 있으니까. 먼지에 시달리는 나와는 달리 새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모래 빛깔을 한 물새들이 모래톱에 앉아 쉬는 중이었다. 오늘 치 식사와 수영을 다 마치고 일광욕을 즐기는 것 같았다.


강의 다른 쪽에 모여 있는 또 다른 새들은 아직도 물속이었다. 부리는 희고 머리는 검은색이며 몸은 짙은 회색인데 꼬리 쪽은 살짝 더 진한 회색이었다. 오리와 닮은 듯했지만 검색해보니 오리과가 아닌 뜸부기과에 속한 새, 물닭이었다. 우리나라 호수, 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울 철새라고 한다. 우리동네 강에서 사는 새들 중 가장 많다. 물이 담긴 넓은 그릇에 살아 움직이는 오레오 오즈 시리얼을 잔뜩 부은 모습이랄까. 든 자리가 저리 크니, 봄이 오면 물닭들의 난 자리도 퍽 클 것 같다.


하늘엔 맹금류 일곱 마리가 떠 있었다. 까만 날개를 펴고 비행 중이었다. 왼쪽에서 한 마리가 더 날아와 여덟이 되었다. 저 우람한 새들은 날개를 펄럭이지 않았다. 기류를 타고 있나 보다. 이미 굉장한 높이인데도 땅에서 계속 멀어졌다. 부동의 날개로도 희한하게 위로 올라갔다.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탔나 보다. 아니면 나선형 에스컬레이터를 탑승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그라미 궤적을 그리며 까마득하게 작아졌다. 겨울 철새인 저 독수리들은 두툼한 하늘을 아낌없이 활용했다.


바람이 불었다. 갈대가 솨아아 부대꼈다. 갈대는 속이 비었으니 관악기이고, 얇고 길쭉한 선으로 되어 있으니 현악기이다. 7음계를 초월한 자연의 관현악은 푸근하고 시원한 소리를 퍼트렸다. 상쾌한 소리에 귀와 발이 다 붙잡혔다.


바람이 멈췄다. 조용해진 갈대밭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 작은 새 같은 게 튀어나오려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저 멀리 네 발 짐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작은 엉덩이. 땅을 차는 작은 뒷발. 매우 짧은 꼬리. 나는 눈을 최고로 크게 떴다. 그렇게 해도 무슨 동물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몇 초 만에 갈대 속으로 사라졌다. 강변 수풀에서 새 아닌 다른 동물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강에 형성된 하중도엔 나무가 무성하다. 나무 틈엔 쓰레기가 손톱 때처럼 끼어 있다. 그 쓰레기들 사이에 큰 새 두 마리가 서 있었다. 새들의 목은 숫자 2 모양으로 휘어졌고 뺨은 희고 날개랑 등은 회색이었다. 왜가리인듯했다. 요즘 '불멍'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단어 뒤에 '-멍'을 붙여서 뭔가를 멍하게 바라보며 쉰다는 뜻의 신조어이다. 왜가리들은 '물멍' 중이었다. 나는 왜가리들을 보며 '새멍'을 했다.


왼쪽 방향에서 날아온 오리 때문에 나의 '새멍'은 종료되었다. 붉은 기를 살짝 띈 연갈색 오리였다. 그 새는 날쌔게 하강했다. 완만한 예각을 그리며 강물에 착륙하고 있었다. 내려앉을 지점은 하중도 뒤쪽이라 오리는 내 시야에서 곧 사라졌다. 새가 물에 내려앉는 소리(추아아악!)가 들렸다. 오리는 하중도 뒤에 숨었고 나는 술래가 되었다. 이 숨바꼭질은 나에게 불리했다. 날개나 보트가 없인 하중도에 닿을 수 없으니까.


소로의 책에서였던가. '로제트형 식물'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땅에 찰싹 달라붙어 장미 꽃잎을 연상하듯 겹겹의 잎을 사방으로 피운다고 하여 '로제트'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대표적인 로제트형 식물로는 민들레가 있다). 오늘은 못 보던 로제트형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희뿌옇게 헝클어진 겨울 잔디 이불을 뚫고 나온 동전만큼 작은 초록 잎이었다. 여기저기 온통 태어나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니 짧고 하얀 잔털이 초록 잎에 촘촘히 달려 있었다. 작고 여린 몸으로 늦겨울을 견뎌보려고 털옷을 입었나 보다. 검색해보니 꽃다지라는 식물이었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이란다. 그래서 2월도 안 된 시기에 일찌감치 태어났구나. 복슬복슬하고 앙증맞은 초록 잎이 경이롭고 반가웠다. 지구 온난화로 너의 선잠을 깨워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일은 깜빡 잊어버렸다.


공원의 동물과 식물들은 그냥 거기서 산다. 밥을 먹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햇살을 쬔다.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 위대한 업적을 이뤘노라고 뻐기는 새는 없다. 자신이 하찮다며 우울해하는 들풀도 없다. 자기가 할 줄 아는 노래를 부르며 자기가 피울 수 있는 잎을 펼칠 뿐이다. 그걸 보는 게 참 좋다. 감동이 된다.


그저 살아 있는 나의 삶에도 감동적인 구석이 있을까.








- 2021년 1월 28일의 산책 -


오늘은 막내와 함께 오전 산책을 나왔다.


우리 애들은 강변 산책로에 오면 모래톱부터 간다. 거기서 나뭇가지나 돌, 조개껍질을 모으면서 논다. 물새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막내는 꽤 큼직한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아이는 묘목을 심듯 모래 위에 나뭇가지를 꾹 눌러 심었다.


나는 모래에 찍힌 새 발자국 보는 걸 좋아한다. 모래 위엔 반듯하게 닦인 도로나 신호등이 없다. 걷고 싶은 대로 누비면 된다. 새들은 그 땅 위에 자기의 궤적을 자유분방하게 찍어놓았다. 이쑤시개 같은 세 가닥의 발가락 자국이 체인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사슬은 이리저리 겹쳐져서 어떤 곳은 삼거리, 어떤 곳은 육거리를 이루었다. 나는 새의 자취 위를 걸었다. 총총 걸어갔을 새를 졸졸 따라 걷는 느낌이 즐거웠다.


강 건너 모래톱엔 독수리 일곱 마리가 모여 있었다. 꽤 먼 곳이었지만 독수리의 몸집이 커서 선명하게 보였다. 서 있는 모습이 거의 사람만 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맹금류다웠다.


우리는 모래톱에서 벗어나 잔디밭 산책로로 올라왔다. 산책로를 몇 걸음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나와 막내 바로 옆으로 독수리가 스쳐 날아갔다. 너무 놀랐다. 독수리가 이렇게나 낮은 고도로, 사람 가까이에서, 더군다나 내 가까이에서 비행하다니. 나는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냈지만 독수리는 순식간에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저렇게 먼 건너편 모래톱에서 막내와 내 곁을 지나 지구의 천정으로 솟아오르기까지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충격적인 조우를 증거로 남기지 못해 애석했다. 켜 보지도 못한 휴대폰을 손에 쥐고 나와 막내는 "헐 대박, 헐 대박" 거리면서 작아져가는 독수리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찰나였지만 가까이에서 체감한 독수리는 정말이지 과하게 커다랬다. 까만 경비행기 같았다.


산책로 옆 잔디밭에선 오늘도 후투티가 식사 중이었다. 후투티가 날개를 접고 있을 땐 몸 색깔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한쪽은 옅은 갈색이고 나머지 반쪽은 흰색 검은색 줄무늬이다. 막내가 후투티를 보더니 새가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그래? 하고 되물으니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가 집에서 입는 옷이랑 비슷해요. 줄무늬 옷 말이에요." 내가 집에서 자주 입는 티는 흰색 바탕에 검은 스트라이프가 그어져 있다. 내가 떠올리지 못한 걸 생각해낸 막내가 귀여웠다.


공원 돌계단에는 1밀리미터가 될까 말까 한 균열들이 있다. 자연은 그런 빈틈까지 알뜰하게 쓴다. 동글동글하고 작은 초록 잎이 거기에 뿌리를 내렸다. 검색해보니 금전초 또는 긴병꽃풀이라는 식물이었다. 여느 봄 식물처럼 금전초 역시 나물로도 먹을 수 있고 온갖 약효도 있었다. 정말이지 봄은 못 말린다. 누군가를 낫게 해주고 싶어서, 누군가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어서, 삭막해진 시선과 마음을 초록의 감동으로 전복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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