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나는 치료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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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거푸 서른 번 불합격 통보를 받고 슬럼프에 빠지니 손가락 근력부터 고장 났다. 숟가락보다도 가벼운 태블릿 펜을 도무지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소싯적에 양손에 5kg 아령을 쥐고 운동했던 적도 있었는데. 막내를 등에 업고 큰애는 앞으로 안고 한쪽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건 채 지하철을 척척 타던 나인데.


의외로 기분이 막 처참하진 않다. 엉엉 울지도 않는다. 대신 막막하면서 덤덤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맘맘, 덕덕, 아니면 막덤? 아무튼 그런 괴상한 합성어 같은 기분이다. 대체로 멍한 상태이나 문득 맥락도 없이 눈물이 출렁 차오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보면 걱정할까 봐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이전엔 하루를 알뜰하게 보내는 걸 좋아해서 매일 아침 to do list를 적곤 했다. 하지만 슬럼프에 걸린 환자는 그런 일에 신경 쓸 세포가 죽어버린다는 게 학계의 정설. 그냥 되는 대로 살았다.

평소 건강한 식단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막막 덤덤한 나는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계속 먹었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도서관에서 잔뜩 대여했고, 잘 보지 않던 영화도 두어 편 봤다. 아이가 부탁하면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고 흔쾌히 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데로 집안일을 했다. 구멍이 보이면 바느질을 하고, 바쁘다고 외면했던 겨울 빨랫감들도 셀프 드라이클리닝으로 빨았다. 다리고, 쓸고, 닦고, 썰고, 끓이고, 찌고, 볶았다. 멍하게 앉아있으면 기분이 더 울적해졌다. 생각을 해볼까 싶으면 자기 비하만 하게 됐다. 나쁜 기분과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집안 구석구석의 주름이 펴지고 깨끗해졌다. 내가 차린 밥상으로 식구들의 생명이 연장되었다. 가족 세 명의 몸에 사는 수조 곱하기 수조에 해당하는 미생물에게 내 손으로 식사를 대접했다. 세 사람에게 있는 도합 111.6조 개의 세포는 내가 빨아준 깨끗한 옷 안에서 쾌적해했고, 내가 차려준 현미밥과 샐러드와 나물 반찬, 된장국, 두부조림의 영양분을 먹으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내 손이 우주적인 차원의 기여를 하고 있는 걸 보며 슬그머니 맘이 좋아졌다. 오랜 수고들이 모래성처럼 뭉그러져서 허탈했는데, 그렇지 않은 일도 있구나. 세상 일 중에서 집안일은 은근 티 나는 일이었구나. 멍 때리며 손댄 집안일들은 덩치 큰 슬럼프를 겁도 없이 야금야금 지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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