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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13. 2020

게으르게 만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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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산책길에 다가서자 산이 한 겹 가까워졌다. 산 위에는 넉넉한 크기의 구름이 떠 있었다. 푸른 산이 흰색 산을 업어주는 것 같았다. 저런 대규모 구름은 누가 만들었을까. 손가락 마디 한 칸이 100미터인 거대한 손이 만들었을 거다. 그 손은 도시 하나만큼 커다란 구름 덩어리에서 수제비 떼듯 구름 반죽을 뚝뚝 떼어냈다. 수제비의 미덕은 야들야들 얇게 떼어낸 반죽에 있다. 그러나 거대한 손은 수제비 실력자는 아닌 성 싶었다. 그 손은 자기를 닮은 거대한 구름을 게으른 솜씨로 만들었다. 대충 뜯어내어 하늘에 띄운 산 같고 섬 같은 구름들. 파란 하늘엔 그런 구름투성이였다.


어떤 구름은 너무 가까워서 곧 착륙할 것처럼 보였다. 마스크를 쓴 산책객들이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조금 뒤 도착할 구름에 탑승할 승객들인가 보다. 첫애와 둘째는 집에서 킥보드를 들고 왔다. 활주로 마냥 뻗은 긴 산책길 위에서 아이들은 오른발을 팍팍 찼다. 킥보드는 쌩쌩 달렸지만 좀처럼 이륙하진 못했다. 나로부터 쭉쭉 멀어지는데 그쳤다. 하늘에 방문하려면 벤치 정류장에 앉아 근두운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왼쪽엔 배롱나무꽃, 오른쪽엔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여름과 가을 사잇길을 아이들이 달렸다. 나는 아이들이 질주한 방향으로 슬슬 걸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아기 벌레들에게 골고루 눈 인사할 수 있는 속도를 유지했다. 쪼그려 앉아 그것들의 초상화를 찍어주기도 했다. 일어나 보니 50미터 앞에서 달리던 아이들이 자전거 무리에 가려졌다. 아이들이 안 보여서 답답하던 차, 자전거들이 아이들을 추월했다. 아까보다 더 작아진 아이들이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구름에 난 구멍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아이들과 비슷했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몸에 구멍 난 구름이 제법 되었다. 구름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구멍을 조용히 메꾸었다.


손톱만 해졌던 아이들이 미끄러지듯 코앞까지 와서 급정거했다. "누가 더 빨랐어요?" 실제 크기로 돌아온 아이들은 질문하고 웃고 헥헥거리고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오는 동안 엄지손가락만 한 하얀 애벌레를 봤어요. 앞은 갈색이고 뒤는 검은색이고, 어 아닌가? 아무튼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일 것 같아요." 조잘 조잘 조잘. 아이들 이야기를 재밌게 듣던 구름 하나가 애벌레 모양으로 꼬물꼬물 변했다.


착륙이 임박한 웅장한 구름은 아랫면을 반반하게 다지고 있었다. 둥그런 회색 밑면이 널찍했다. 그 구름은 인심 좋은 그림자를 나눠주었다. 산책길을 팍팍 쌩쌩 왕복하던 아이들은 시원한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잠바 지퍼를 열고, 잠바를 벗고, 모자를 벗고, 티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저렇게 놀다가 밤에 다리 아프다고 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내 맘을 읽어서일까, 충분히 놀아서일까, 아이들이 집에 가자고 했다. 다행스러웠다. 구름의 착륙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살짝 아쉬웠지만.


집에 가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산책하며 본 것들이 우리를 비밀스럽게 배웅하고 있을까 봐서. 조용히 작별 인사 중인 거대한 손의 빠이빠이 같은 건 없었다. 산 위의 구름이 아까보다 표나게 부풀어 있긴 했다.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뺀 구름이 멀어져 가는 우릴 아쉽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싱크대 배수구 청소한 게 생각난다. 배수구에 과탄산소다를 잔뜩 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찌꺼기를 머금은 거품이 오븐 속 빵 반죽처럼 부풀었다. 구름은 어느 땅, 어느 마을, 어떤 사람을 씻겨주고 있기에 저리 부풀어 오른 걸까.


인도와 차도가 구별되지 않은 주택가를 걸으며 아이들은 킥보드에서 하차했다. 조심스럽게 자기 자가용들을 드르르 끌고 갔다. 손잡이에 묶인 작은 잠바가 살랑거렸다. 포근하고 청명한 9월 2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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