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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29. 2020

밋밋하고 색다른 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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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숲속을 산책하는 일은 내게 그 어떤 상담 치료나 의약품 못지않은 치유 효과가 있다."*라는 에마 미첼의 말은 내게도 진실이다. 하얗게 빛나는 촘촘한 갈대들은 모세관 현상을 일으켜서 내게 있는 칙칙한 잡념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반짝거리는 갈대들이 물에 쏟은 글리터처럼 눈부셨다. 


수 천 평의 공원. 그곳 가장자리에 가느다랗게 그어진 갈대 옆 산책길을 걸었다. 내 앞과 뒤에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나뿐이지만 심심하지 않았다. 잠자리, 비둘기, 직박구리, 참새, 오리, 나비. 이 작은 생명들이 오늘의 동행이었다. '동행'이라기보단 '공원 공동 점유'에 가까웠으려나. 그들은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제 할 일에 몰두했다. 공원의 온갖 거주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산책의 큰 기쁨이다.


비둘기 세 마리가 수풀에서 뭔가를 쪼고 있었다. 공원에 있는 비둘기들은 건물 그림자 속에 사는 비둘기보다 깨끗하다. 그 모습이 어여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려고 팔을 들썩했더니 비둘기들이 화들짝 질겁하며 가로등 위로 날아가 버렸다. 새들의 조심성이란…. 인간이 새 정도로 거리 두기를 잘 했다면 코로나가 이렇게 확산되진 않았겠지. 비둘기들의 수풀 작업에 지장을 줘서 미안했다. 사실은 말만 이렇게 했지, 나는 기어코 비둘기 사진을 찍었다. 지독한 인간이다. 하지만 높은 가로등 위에 앉아 목을 갸웃거리는 모습이 너무 예쁜 걸 어떡해.


걷기 시작하면 몸 아래쪽에서부터 신호가 온다. 처음에는 왼쪽 발바닥 굳은살 부분이 푹푹 쑤신다. 몇 분 지나면 발은 멀쩡해지고 엉덩이뼈가 아프다. 그 감각도 조금 뒤 사라진다. 통증은 계속 위로 향하다가 허리에 안착한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면 허리의 욱신거림도 곧 사라진다. 걷는 동안 약하고 아픈 부분이 위로 떠오르다가 끝내 증발되는 식이다.


척척한 통증을 가을 햇살에 말린 후 가뿐한 몸으로 삼사십 분 걷다 보면 선선한 공기를 가르는 피부에서도 땀이 난다. 몸에 덮인 것들을 주섬주섬 벗을 차례다. 제일 먼저 마스크를 벗는다(사람 없을 때). 소매를 팔꿈치 위로 밀어 올린다. 그다음엔 외투의 단추를 푼다. 몇 분 지나면 아예 외투를 벗어서 허리에 묶는다. 드러난 팔의 반절로 쨍한 햇볕을 섭취한다. 들기름보다 고소한 맛이다. 밤에 잠 잘 오겠다.


"탁-탁-".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비비탄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와 비슷했다. 긴장감이 발을 멈춰 세웠다. 사태를 파악하느라 눈을 굴리고 귀를 기울였다. 소리의 출처는 수풀. 아주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들렸다. 아무리 봐도 장난감 총 같은 건 보이진 않길래 안심하고 다시 걸었다.


산책길의 끝에 도착했다.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을 돌아갈 차례다. 찍어둔 발자국을 복기해 나가 아까의 소리들과 다시 만난다. -- 거리는 소리는 아직 한창이었다. 다시 들어보니 번쩍! 하고 깨달음이 왔다. 알겠다 알겠어, 저거 팝콘 터지는 소리잖아. 수풀 속에서 새와 곤충들이 팝콘을 튀기는  분명했다. 의문은  해결했는데 갑자기 강냉이가 먹고 싶어졌다.

탁-탁- 소리가 멀어지자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연하게 들렸다. 찻길과 산책로는 기껏해야 15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둘 사이에 작은 언덕이 있어서 사나운 질주의 소리를 어지간히 막아준다. 흙길을 밟는 자박자박 소리, 가늘고 높게 삑삑 거리는 작은 새의 노래, 공원에서 가장 시끄러운 까마귀의 성실한 까악 까악 소리도 사이좋게 섞여서 도시의 목소리를 밀어냈다. 질투 많은 헬리콥터가 두다다다 아우성을 한차례 메다꽂긴 했지만.


산책은 새로운 고민도 만들었다. 내 걸음이 비둘기의 걸음에 비해 너무 빠른 것이다. 비둘기 몇 마리가 내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걷다가 나와의 거리가 2미터 정도로 줄어들면 "엄마야!"하면서 앞으로 껑충 날아갔다. 또 좁혀지면 또 날아갔다. 이걸 셀 수 없이 반복했다. 평화로운 새들의 산책을 본의 아니게 자꾸 훼방 놓게 됐다. 나는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고 통통한 새들은 피곤해졌다. 결국 비둘기들은 드높이 이륙하더니 뻥 뚫린 공중에 회전교차로라도 있는 듯 시원하게 한 바퀴 휘- 돌았다. 그러곤 강 건너편으로 훌쩍 착륙. 몇 초 만에 굵직한 물을 우습게 건넜다. 저렇게 날면 얼마나 신날까. 부럽다. 좋겠다.


새가 높은 곳을 날며 이 공원을 내려다보면 밋밋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아기자기한 맛이라곤 비둘기 똥만큼도 없는 공원이다. 그런데도 올 때마다 색다르고 볼 게 많아서 불평할 수가 없다. 11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단풍마는 짱짱한 초록색으로 건재했다. 목질화된 줄기 끝에서 흔들리는 코스모스들은 조부모의 목말을 탄 손주처럼 까르르 웃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기술 좋게 지어진 새 둥지는 우리 집보다 안락해 보였다. 수 십 마리의 비둘기가 베테랑 파일럿인 양 충돌을 모른 채 곡예비행을 했다. 저토록 경이롭게 날면서도 비둘기들은 자신의 재주에 초연하다. 비둘기들은 비행하는 자신의 셀카를 찍은 후 해시태그 뒤에 '닭둘기라고 한 X 다 나와'라고 적어 SNS에 박제해 놓지 않는다. 비둘기는 야윈 강을 자신의 그림자로 걱정스럽게 훑을 뿐이었다. 가을 가뭄 때문에 물새들의 수영장이 좁아지고 있었다. 얼굴과 팔에 일광욕하느라 좋아했던 것이 뒤늦게 무안해졌다.


수수하게 아름다운 이 공원은, 한편 잘 편집된 자연이다. 이 프레임 밖의 자연에서는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쌓이고 땅이 파이고 산이 깎이고 동물이 대량으로 도살되는 중이다. 이 생명 저 생명 할 거 없이 무자비한 대우를 받는 현실은 말끔한 산책로 뒤에 가려져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란 소유로 조각난 땅을 깁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 때문일까. 멀쩡하게 가꾸어진 길을 밟다 보면 약탈되고 부스러진 자연들이 눈에 와 밟힌다.


-2020년. 10월 29일. 산책 기록-








*. 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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