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 Jan 04. 2021

정신 나간 생명들과 착륙의 도사들

Copyright 2021. 녹차 all rights reserved.



-2020년 11월 12일의 산책-



오늘은 산의 가장자리를 부엌칼로 써야겠다.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산도 날카로운 테두리를 가졌다. 눈에 들어오는 네 겹의 산이 하나같이 쨍하게 보인다. 저렇게 똑떨어지는 윤곽이라면 파 두 단은 시원하게 썰 수 있겠다.


오늘은 원근법이 파기된 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선명도가 100에 가까워진 날이다. 벌레들도 조심성을 던져버리고 나처럼 집에서 뛰쳐나왔다. 티 없는 대기를 뚫고 펑펑 내리는 햇살에 두드려 맞은 우리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 잠자리는 허공에서 순간이동하듯 비행했고, 귀뚜라미 비슷한 것은 땅을 팍 팍 찼다. 무당벌레는 키 크고 바삭한 식물의 줄기를 뒤뚱뒤뚱 등반했고, 나는 눈과 입을 반달 모양으로 만든 채 산책로를 걸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도, 기쁨의 몸짓들도 다 또렷했다.


일광욕의 유혹에 패배한 드글드글한 곤충들은 투명한 공기 덕에 눈에 잘 띄었다. 새들에게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상황이었다. 가장 배고픈 새는 까치. 미색의 짧은 잔디 위에 드문드문 포진한 까치 열다섯 마리가 땅을 쪼아댔다. 그 자리는 구기 종목을 할 수 있도록 흰 테두리를 그어 놓은 곳이기도 했다. 식사 후에 까치들이 피구 한 게임하려나 보다.


까치 크기의 1/3만 한 작은 새가 갈대에 착륙했다. 멀어졌던 요요가 손으로 돌아와 찰싹! 붙는 동작이 연상되는 경쾌한 안착이었다. 착지와 동시에 꼬리를 포르르 떨며 무게 중심을 잡는 몸짓은 박사보다 유능했다. 비행사가 어찌나 가벼운지 젓가락 같은 갈대가 거의 휘청이지 않았다. 메리 올리버는 폴짝폴짝 뛰어가는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네가 하는 일을 참 잘하는구나!"* 나도 저 이름 모를 새에게 같은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저 새 안엔 제 크기의 열 배가 넘는 생명력과 지혜가 농축되어 있다.


똘똘한 작은 새를 보느라 넋을 놓고 있는데  느닷없이 촤르륵! 소리가 났다. 오리  마리가 강물에 미끄러지듯 내려앉은 소리였다. 빠르게  돌아보았는데도 새들의 강하와 착륙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비행기의 착륙 필요한  거리의 감속 주행 따위는 오리에게 필요 없었다. 언제 물결을 일으켰냐는  시치미를 떼며 조용히 강에  있을 뿐이었다. 새들은 날기도  하지만 착륙에도 도사였다.






*. 메리 올리버, 시 「가자미, 여덟」 중, 『완벽한 날들』




이전 02화 밋밋하고 색다른 보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