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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체리 May 14. 2020

시험 중독 탈출 프로젝트 4 -잘난 과거는 날려 보내라

                                            

과거의 나를 천등날리듯 날려보내기로 했다




나는 왕년에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 과거도 무려 몇십 년 전이다)

중학교 때는 남들만큼 놀았어도 전교 1등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머리 좋은 아이들한테 조금씩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명문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나의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 시절에 비해 현재의 초라한 나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공부 좀 했어도 지금은 별거 없네"


친구의 말 한마디 때문에 결국 절교한 적이 있었다.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던 친구였다. 내가 조금 작은 평수의 집에서 살게 되었을때, 생활비를 줄여야 해서 돈걱정할 때마다 이 말을 나에게 해맑은 표정으로 툭툭 던졌다. 처음에는 그냥 웃으면 넘겼지만 그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드디어 나의 옹졸함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몇 번 주의를 주어도 개선되지 않자 그 친구와 마음속으로 절교를 해버린 것이다.  

    

십 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 했던 그 친구를 단칼에 잘라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나의 열등감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과거의 나 정도면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현재의 나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 친구가 기름을 부은 것이다.   

 

'왕년에 공부 좀 했던 네가 겨우 이 정도였냐?'  


시험에  반복적으로 떨어지면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 친구의 말을 퍼붓고 있었다.  그 친구보다 훨씬 모질고 강도가 세고 횟수가 잦은 악질적인 말이었다. 내면의 내가 쏟아내는 말이므로 절교할 수도 없었다. 듣기 괴로웠지만,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인정하기에는 마음의 상처가 쓰렸지만, 나의 현재 모습이 무엇 하나 이뤄놓지 못한 고시 낭인의 모습이었으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공부의 달인쯤 되던 내가 왜 이 시험 앞에서는 열등생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부방법이 시험 스타일에 맞지 않기 때문인지, 답안 작성법을 터득하지 못한 이유인지, 스터디원을 잘못 모집한 것인지, 학원을 더 많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점점 노화되어 가는 두뇌 때문인지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나의 수험 생활을 끝마쳤다.  


    

과거보다 초라한 삶을 사는 것은 괴롭다. 특히 친척들 경조사에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어렸을 때 집안에서 공부 좀 하기로 소문났던 네가 왜 그 꼴로 살고 있냐는 묵언의 물음을 느끼게 된다. 누구네 집 누구는 연봉이 얼마이고 누구는 공무원 20년 차이며 누구는 대기업 연구직이란다. 궁금하지 않은 소식도 그 자리에 가면 듣게 된다.


미혼이라면 미꾸라지처럼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빠질 수도 있지만 기혼에게는 쉽지 않다. '오늘은 당당하게 웃으며 버텨보겠어'라고 다짐하고 시작하지만, 정작 돌아올 땐 엉킨 파래무침처럼 엉망이 된 내 마음을 달래면서 울고 싶어 졌다. 경조사는 과거보다 못나게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시험을 포기하면서 한 가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야, 공부 좀 했던 니 과거가 그리 대단하냐?' 생각해보면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과거에 1등 해봤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노량진에서 만난 수험생들 대부분은 집안에서 영재로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전공 강의실에서 '1등 해봤던 사람 나와'라고 하면 절반 이상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S대쯤 나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S대를 나오면 또 어떤가. 과거에 견주어 현재의 삶을 평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한강이 보이는 주상복합에서 살다가 30평대 서민아파트로 내려앉았다고 매일 울상 짓던, 사업 실패한 고모부와 같은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로 끊임없이 교장 선생님으로 살던 시절을 늘어놓았던, 신혼 때 살던 아파트의 경비아저씨처럼도 살게 될까 봐 더럭 겁도 났다. 



과거의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과거에 우등생으로 기대를 받고 모범생으로 칭찬을 받던 과거의 나를 엉덩이 툭툭 쳐주고 '너 정말 대단했다'라고 맘껏 치켜세워준 후 떠나보내기로 했다. 불 붙인 천등을 날리듯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말이다. 


그리고 원래부터 서민 아파트에 살던 사람, 원래 경비원으로만 살았던 사람으로 그렇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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