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얼마 전 대학 친구들과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직장이 생긴 뒤부터 매년 여름이면 함께 물놀이를 떠나던 멤버들인데, 이게 햇수로 13년이나 되었음을 올여름에야 알았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남도 통영까지, 전국 각지 계곡과 바다를 찾아 떠났던 우린 언젠가 반드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기로 약속했다. 일단, 약속은 했다.
초창기엔 대충 과자 몇 봉지를 까놓고 그저 새벽까지 먹고 마시기만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여행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젠 음식도 정갈하게 차려놓고 중간중간 재미있는 게임도 한다. 최근엔 ‘원카드’란 고전 게임을 ―아주 건전하게― 즐겼는데, 판마다 1등이 빠져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꼴찌가 설거지를 담당하는 그런 벌칙을 행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설거지는 나의 몫이었다! 마지막 일대일 대전에서, 하필이면 카드가 한 장 남은 상대가 실수로 카드를 떨어뜨렸고 얼핏 그 카드가 보였지만, 내가 제시한 카드는 ―역시나 하필이면― 상대가 정확히 원하는 모양과 색을 지니고 있었다. 다들 어리둥절하며 “떨어진 카드 봤던 거 아니야?”, “숫자나 모양은 몰라도 색깔은 봤을 것 아냐?”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나의 눈은 적록 색약을 앓고 있어서 가끔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는걸.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지며 모두가 배를 잡고 웃는 광경이 펼쳐졌으니……. 그래. 그러면 되었지, 뭐.
사실 색과 관련한 더욱 충격적이었던 사건 아닌 사건은 언젠가 립스틱을 선물하기 위해 화장품 가게에 들렀을 때 벌어졌다. 아니, 빨간색이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니라고요? 레드가 있는데 그 옆엔 딥 레드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뿔싸, 핑크는 더 심했다! 코랄 핑크, 피치 핑크, 로즈 핑크, 밀키 핑크, 루니너스 핑크에 아니, 핑크 브라운은 또 뭐람?
“이거 다 똑같은 거 아녜요?”
“에이, 무슨 말씀이에요. 전부 다 다른 걸요?”
색약을 앓고 있는 주제에 무슨, 직원분이 다르다고 하니 다른 거겠지. 그렇지만 확신한다. 이 시대의 남성들은 다들 나와 같은 적록 색약을 앓고 있을 거라고!
급식이 매일 맛있을 수는 없다. 모두가 만족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런데 그날 식단에 대한 ‘호 好’와 ‘불호 不好’는 주로 메인 메뉴로 인해 결정된다. ‘오늘 급식 뭐야?’라고 물었을 때 그 누구도 절대 ‘밥’에 대해 논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같은 돼지고기여도 갈비찜이냐, 사태찜이냐에 따라 아이들의 반응은 확연히 달라지지만, 밥에 대한 논쟁은 결단코 없다. 그래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치 식단을 들여다보았을 때, 매일 매일 다른 ‘밥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립스틱을 선물하려고 화장품 가게에 갔을 때 빨강과 핑크의 종류가 수십 가지나 된다는 걸 처음 알았던 그때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하나하나 밥들의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나 백미밥. 말 그대로 흰 쌀밥이다. 흰 쌀만 있으란 법이 있나, 흑미밥도 빼놓을 수 없지. 쌀 종류가 색으로만 구분되란 법이 있나, 찹쌀밥, 기장밥, 차수수밥, 차조밥, 혼합잡곡밥, 강황쌀밥, 현미밥, 보리밥 등 라인업은 화려하다. 2002년 우리나라의 월드컵 멤버들처럼 뭐 하나 빼놓을 수가 없이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게 녹아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류 중 가장 뛰어난 창의성을 지닌 우리 민족―특히 영양사 선생님―은 응용력을 있는 힘껏 발휘하여 새로운 밥의 이름을 창조해냈다. 소고기김가루밥, 삼색소보로덮밥, 곤드레밥, 콩나물밥, 새우볶음밥, 심지어 김밥볶음밥까지. 식판 위에 담긴 그날의 메뉴 속에서 밥은 고작 밥이겠지만, 알고 보면 밥도 늘 다르다. 아니, 다르다기보단 색다르다. 그들만이 가진 특별함으로 인해 점심시간은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걸, 나는 놓치고 있었다.
특정 직업군을 떠올리면 틀에 박힌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정치인? 권위적이고 선거철에만 깨끗한 척하는 위선자. 하지만 모든 정치인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정직하고 깨끗하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이들도 존재할 거라 믿는다. 종교인? 깨끗하고 청렴하며 세속적이지 않은 현인 賢人. 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구보다 타락한 삶을 사는 이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물론, 없으리라 믿는다만. 그나저나 문득, 나의 직업군은 인류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칠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학교나 교사에 대한 인터넷 뉴스를 보면 생각보다 어릴 적 학창 시절의 기억이 추억보단 아픔으로 떠오르는 이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댓글을 통해 자기 경험 속 교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늘어놓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분명, 참스승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고 더 나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도 있으리라. 나도 조금은 다른,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스승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조금씩은 다르다. 같은 직업, 같은 지역, 심지어 가족이라고 하면 성향이나 성격 모두가 일치할 것으로 오해하지만, 누군가는 현미밥처럼 고소하고, 누군가는 곤드레밥처럼 건강하며, 또 김밥볶음밥처럼 맛과 영양을 고루 갖춘 이도 있을 테다. 나도 뻔하지만은 않은, 누군가에게 특별함을 선사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살아가는 나날도 그러하다. 매일 백미밥만, 잡곡밥만, 아니 밥만 먹고 사는 이는 없다. 면도 먹고 빵도 먹고 때론 한 끼에 밥도 면도 빵도 다 먹고.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듯 지루한 삶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하루라는 커다란 드라마 속엔 소소한 작은 행복들이 ‘씬 스틸러’가 되어 새롭게 장면을 채워주고 있지 않을까? 비록 색은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맛은 제대로 구분할 줄 알기에, 적어도 매일 다른 급식으로 인해 나의 하루는 이미 그러하고 있으니, 당신의 끼니도 그러하길. 그래서 당신의 하루도 충분히 행복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