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로마에 왔다. 대한민국 부산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로마 시각 2022년 1월 23일 정오경. 날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롯한 하나는 내가 로마에 왔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공세 와중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특별할 건 못 된다. 전 지구를 위협하는 것이 어디 전염병의 창궐뿐일 텐가. 심각한 기후 변화, 파괴되는 생태계, 잠재적 핵폭탄인, 지구촌 곳곳의 수많은 원자력발전소……. 한 번씩 떠올려보노라면 세상이 무서워지곤 한다. 우리는 한 치 앞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마구 돌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가히 생은 캄캄하고 위태한 것.
하지만 지옥의 문 앞에서도 생은 계속된다. 아침이면 해는 뜨고 밤이면 별은 반짝인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놀고 꽃은 졌다가도 다시 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때론 분노하고 때론 가슴을 치며 오열할 수 있는 것이리라. 순간순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정녕 우리네 나날의 삶의 진실을 언어화하는 데 기적-이라는 말만큼 적절한 것이 달리 있을까?
나는 왜 로마에 왔나. 열 며칠 후면 큰딸의 결혼식이 로마 시청이 지정한 한 성당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미리 덧붙이자면 큰딸은 만삭의 몸으로 혼례를 치른 한 달여 후엔 자신의 딸도 낳는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큰딸은 어쩌다 이탈리아 청년과 로마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나? 일단은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 두자. 이른바 국제결혼이란 게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시절도 시절이려니와 저간의 사연에 대해선 곧 이야기하게 될 테니까. 다만 나는 어떤 일에 대한 이유, 그러니까 어떤 결과에 맞춤한 하나의 원인을 찾는 일을 점점 포기하게 되었다는 건 말해두고 싶다. 인과의 법은 반 정도만 진실일 뿐이다. 그러기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진실도 있는 것일 터다.
사실 나는, 아니 우리(둘째 딸과 아내, 그리고 나)는 이탈리아 무사 입국을 위해 코로나 백신 추가 접종은 진즉 해 놓았고 출국하기 전전날엔 2차 병원에서 각각 10만 원이 넘는 돈을 내고 PCR 검사를 받았으며 그 다음날엔 음성 판결 확인서도 영문으로 챙겨 두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한 변형인 오미크론이 우리나라에서도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이라 출국 일주일 전부터는 셋 모두 바깥 출입도 삼갔다. 그랬긴 해도 이탈리아의 해외입국자에 대한 방역 방침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격리를 당하게 되면 어디서 얼마나 그래야 하는지, 이런저런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인천 공항 발 암스테르담 경유 네덜란드 항공 비행기가 드디어 로마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고 경내 안내 방송에 따라 기외(畿外)로 부친 짐부터 찾은 우리는 잠시 후 약간의 허탈감에 빠졌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가기 전에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받아야 할 걸로 지레 짐작하고 상당히 긴장했는데 마지막 출구까지 가도 그 아무도 우리더러 코로나 접종 확인서나 PCR 검사 음성 결과 증명서를 요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진인사대천명의 위력이 통한 거라고나 할까……?
우리가 석 달 가까이 묵을 숙소는 큰딸이 빌려 둔, 로마 지하철 A라인 상의 치프로(Cipro)역 가까운 25평 남짓한 아파트 4층. 그 유명한 바티칸 교황청이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날 저녁 우리 아파트의 밥상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은 한국에서 온 우리 셋에 로마의 큰딸과 큰딸의 5년 넘은 친구이자 곧 신랑이 될 로마 청년 안드레아. (이탈리아에선 흔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그 이름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자 성 베드로의 친동생인 성 안드레아에게서 왔다)
첫날 저녁의 이야기도 하려면 끝이 없을 것도 같지만 그건 뒤로 미루기로 한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물론 근처 바에서 커피는 한 잔씩 했지만) 바로 달려간(사실은 천천히 걸어서 당도한) 바티칸 광장에서의 한 ‘발견’에 대해 먼저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전엔 올 때마다 인산인해였던 바티칸 광장은 예상대로 한산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력. 혹은 하느님의 뜻. 혹은 자연의 섭리? 아무튼, 그래서였을 것이다. 웅장한 바티칸—성 베드로 대성당을 그냥 흘려 보던 내 눈으로 광장 한쪽에 놓인 한 검은 물체, 광장의 넓이에 비해서는 매우 작다고 해야겠지만 결코 작지 않은 조각상이 확 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난파선에 탄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몸차림과 얼굴 표정을 청동으로 주조한 조각 작품이었다.
첫인상부터 아주 강렬했다. 그 배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교황청을, 교황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의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톨릭이 활짝 팔을 벌리고 있는 것도 한눈에도 명백해 보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달은 거지만 그 조각 작품의 제목은 〈Angels unaware〉(‘미처 알아보지 못한 천사들’; 대개는 ‘부지중의 천사’로 번역)이었고 내가 난파선이라고 생각한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조국의 환란을 피해 이국땅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하는, 경계에 내몰린 이민자들이었다. 작가는 캐나다의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 나로선 하나의 ‘발견’이었다. 모든 게 분명해졌다. 슈말츠 역시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천사’의 하나로 다가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로마든 이탈리아든 유럽 어느 곳이든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나사렛의 청년 예수, 그 십자가의 진실이 결코 꺼지지 않는 광원으로 산재해 깃들어 있는, 오래고도 찬란한 기독교의 역사고 예술일 것이다. 그렇다면 슈말츠야말로 그 아름답고도 영원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각 작품들을 영글게 하고 태어나게 한 자궁은 바로 기독교의 성서라는 걸 기회 있을 때마다 힘주어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미처 알아보지 못한 천사들(Angels unaware)〉은 구약의 히브리서 13장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를, 그의 다른 작품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는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를 청동이란 물질로 형상화시킨 작품인 것이다. (〈노숙자 예수〉의 복제품은 100개의 나라에 전해졌는데 교황청 내 자선소인 작은 무료 병원에도 그 하나가 있으며 우리나라 서소문 가톨릭 성지 역사박물관 정원에도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런데 21세기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가 기원 33년 예수가 십자가의 수난을 받은 것과 꼭 같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 모양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보도에 따르면 미국 뉴욕 성 패트릭 대성당과 캐나다 토론토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는 이 작품 설치를 거부했고 노스캐롤라이나 성 어반 성공회 성당에서는 일단 설치는 했지만 뒤에는 철거되었다고 한다. 신성모독이라는 여론이 그 이유였다. 그들에게 ‘신성’이란 것이 진정 무얼 의미하는진 나로선 잘 알진 못한다. 다만 묻고 싶어진다. 그게 신성모독이라면 노숙자—‘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과 함께 한 예수의 삶 자체가 신성모독은 아닐는지? 2013년 11월 그 청동상을 축복하고 그에 기도했던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동도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그러고 보면 기독교의 역사는 참된 신성과 거짓 신성 간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길항과 전쟁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2015년 당시에도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던 프란치스코 신부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유명 정치가들과의 럭셔리한 오찬 회동을 마다하고 노숙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말씀하셨다 한다.
“하느님의 아들도 이 세상에 올 때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 나라는 20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민주주의, 자유, 정의, 양심, 더불어 삶, 환대, 베풂과 같은 소중한 가치의 순정한 언어들이 정치적 탐욕이 맨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내로라하는 정객과 힘쎈 자들의 뻔뻔한 미사여구로 연일 능욕당하는 사태를 나는 목도하고 있다. 더욱이나 그들의 능욕적 언어가 상당한 여론층에 의해 용인되고 지지받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참으로 슬프고 답답하고 또한 무섭다.
바티칸 광장에 우뚝한 난민선을 보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2022년 지금 대한민국의 우리는 중차대한 어떤 시험대, 혹은 갈림길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과 거짓, 선과 위선, 평화와 전쟁, 사랑과 증오 등의 경계를 무 자르듯 하여 이것만이 옳은 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일도 타당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스무번째로 충직한 국민 일꾼이자 지혜와 덕성을 겸비한 최고 지도자(에 애써 근접하고자 절치부심, 각고면려해 온 정치인)를 뽑는 마당이라 대한민국이라는 소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두마디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두 잘 살게 해 주겠다'? 좋은 말이지만 그건 동서고금을 통털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 '내가 왕이 되면 나라 안팎의 악당들은 다 멸해버리겠다'? 일견 속시원한 말일진 몰라도 그건 참 끔찍한 말이라는 것. '내가 하는 말은 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걸로 생각하라'? 그건 파시즘이나 나치즘으로 통한다는 것.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독교 주기도문은 오늘도 이렇게 간절히 빌고 또 비는 것이지만 나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늘 악마의 시험에 걸려든다. 걸려 넘어진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안일함과 달콤한 거짓말과 장밋빛 환상. 또는 증오와 파괴의 어둔 욕망이라는 마력에.
우리 삶의 진실은 먼 곳에 있지 않다고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하느님의 아들도 이 세상에 올 때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만으로 치자면 조금도 어려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게 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바티칸 광장 한 켠에 앉아 있는 슈말츠의 난민선. 그 배에 탄,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천사의 날개가 좌와 우로 뻗어 있다.
그 난민선을 생각하며 나는 물어본다.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답고도 위태로워 보이는 배는 2022년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