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불패는 주인공이 아니야.
소오강호 편
1990년대 초반, 강렬한 미모를 뿜어낸 중국 배우 임청하의 대표작이 있었다. 그 이름하여 동방불패(東方不敗). 38세의 꽃다운 미모를 자랑하신 임청하 이모님의 명연기와 사람들에게 손꼽히는 명작으로 뽑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 영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방불패의 원작을 찾아서. 중국 무협의 거장 김용 선생(2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의 원작 소설인 소오강호(笑傲江湖)를 찾게 된다. 지금은 소오강호라는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지만 당시만 해도 동방불패라는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책제목도 동방불패로 발간되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도 제목이 동방불패다.)
이연걸이 열연한 '영호충'이라는 캐릭터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화산파 대제자로, 호방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하며 대사형의 풍모를 풍긴다. 영리하지만 답답한 모습도 많고 술수라는 걸 모르며, 재능은 뛰어나지만 술을 좋아하는 주당의 품격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오악검파(화산파, 숭산파, 항산파, 형산파, 태산파)의 하나인 화산파의 대제자이니만큼 명망이 있는데, 사파 인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오해를 사기도 한다.
화산파의 은거 기인인 풍청양으로부터 독고구검을 배워 검술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영호충. 다만 벽사검보를 임평지로부터 훔쳐갔다는 누명을 쓰고 화산파에서 파문을 당한다. 벽사검보는 임씨 가문의 검법인데 규화보전이라는 무공에서 흘러나왔다. 이 검법을 익히려면 (거세를...) 조건이 까다로운데 영호충이 뭐하러... 덕분에 서로 좋아했던 화산파 장문 악불군의 딸 악영산과도 이별을 하게 된다. 후에 악영산은 임씨 집안의 후예인 임평지와 결혼을 하게 된다.
화산파를 나온 영호충은 항산파를 도와주면서 비구니들만 있는 항산파의 첫 남성 장문인에 오르기도 한다. 그는 강호행 내내 내상으로 인해 거의 전투력이 0인 상태로 지내는데, 이 와중에 전 일월신교의 교주인 임아행의 딸이자 일월신교의 2인자 임영영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정과 사를 넘나들던 영호충은 매장에서 우연찮게 전 일월신교의 교주인 임아행을 구해주게 된다. 그리고 그가 남긴 흡성대법을 익혀 내공은 차고 넘치게 되는데 이게 또 여러 사람의 내공을 끌어모으다 보니 조화가 안되는 상황에 빠진다. 다행히 임영영과 소림사의 도움을 받아 역근경을 익혀 내공을 조화하면서 드디어 일대 고수의 반열에 들게 된다.
이제 임아행, 임영영, 상문천과 함께 일월신교의 본거지 흑목애로 가는 영호충. 끝판왕 동방불패와 만나게 된다. 1대 4의 싸움에도 밀리지 않던 동방불패 역시 규화보전을 익히고 있었고, 거의 여성화가 된 상태였다. 끝내 임영영이 동방불패의 남자, 양련정을 인질로 잡아 틈이 생긴 끝에서야 동방불패를 죽이게 되는데, 임아행이 눈 하나를 잃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부러 임아행이 동방불패에게 규화보전을 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은 격.) 역시 세상에 믿을 놈은 없었다.
그리고 영호충은 악불군, 임평지가 벽사검보를 익혔다는 불우한 사실도 알게 된다. (즉, 처음부터 벽사검보를 가져간 사람은 악불군이었고, 제자인 영호충에게 누명을 씌운 것.) 그래도 마지막에 영호충과 임영영은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라는 엔딩을 맞이한다. 결국, 소설상에서 영호충과 동방불패는 흑목애에서 처음 만나고, 죽자고 싸운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그만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동방불패로 잘못 알고 있는 비운의 소설. 그러나 작가의 후기 작품답게 명작으로 꼽히며, 유독 정파와 사파의 경계를 많이 허물었던 소설. 김용 소설 중에서 비교적 시대적 배경이나 색이 많이 빠져 역사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한 무협 소설인 소오강호. 영화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