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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Jun 07. 2020

위소보와 7부인

녹정기 편

  요새 필자가 즐겨 보는 중국 드라마가 있다. <옹정황제의 여인>이라는 드라마인데 청나라 옹정제 시대의 후궁들의 암투를 다이나믹하게 그려낸 드라마로 원제는 <후궁견환전>이다. 청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삼는 것이 바로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대이고, 이 시대를 배경으로 많은 소설과 드라마가 써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극 대다수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가진 사료가 많고 비교적 정확도 높은 이야기가 많은 시대가 가장 최근의 왕조인 청나라, 그리고 조선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김용 선생의 마지막 작품, <녹정기>는 청왕조. 강희제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에서 <소오강호>, <천룡팔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두 편 모두 비교적 역사적 사실을 많이 이용하지 않는 소설들이다. 그에 비해 <녹정기>는 주인공 위소보와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강희제이기 때문에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벽혈검>,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서검은구록> 등과도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위소보는 양주 여춘원이라는 기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위춘방은 여춘원 기녀다. 기방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발라당 까진 위소보는 우연히 모십팔과 함께 청황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모십팔과 함께 위소보를 납치한 태감(환관, 내시) 해공공의 눈을 멀게 하고, 소태감 행세를 해서 졸지에 태감이 된 위소보는 황궁에서 나름 인망있는 태감이 되고,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황제와 친구가 된다. 순식간에 황제인 강희의 절친이 되어버린 위소보는 강희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일들을 대체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소보는 무공을 하지 못한다. 대신 뛰어난 잔머리와 기교. 입담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를 지켜준 건 머리와 입. 구난사태((명나라 장평공주, 벽혈검에서 등장한다.)에게 배운 경공술 신행백변. 그리고 운남 오독교 하철수(역시 벽혈검에서 등장한다.)에게서 받은 암기 함사사영. 석회분이나 각종 간교한 재주들이었다. 김용 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아니, 모든 무협 소설을 되집어봐도 주인공이 이렇게 무공의 'ㅁ'자도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역시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아직 어린 강희제를 위해 고관인 오배, 개국 공신인 오삼계 등을 제거하고 신룡교까지 없애버리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위소보. 그런 위소보에게는 강희제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오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천지회의 진근남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천지회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재건하자는 뜻의 반청복명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무림의 단체이다. 한마디로 이중 간첩이 되어버린 셈. 여기서 평소 위소보의 행동대로라면 양쪽을 오가면서 최대한 이익만 쪽쪽 빨아먹을 것 같은데 의외로 양쪽 모두에게 의리를 지킨다.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위소보는 일곱 명의 부인을 두게 된다. 위소보 자신은 아마 틈왕 이자성과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의 딸 아가를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긴 하지만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에 나올법한 각종 캐릭터들로 무장된 일곱 명의 부인들을 얻는다. (공식적으로 위소보는 태감이다. ㅎㅎ) 그 중에는 유부녀였던 신룡교의 교주 부인인 소전도 있고 강희제의 이복동생 건녕공주도 있다. 운남 목왕부의 목검병에 방이, 증유, 시녀 느낌으로 합류했지만 위소보와 함께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한 쌍아까지.무협 소설 중 가장 무공을 못함과 함께 가장 많은 부인을 두는 기록을 가진 인물이 바로 위소보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주인공들이 여러 여자들과 썸을 타긴 하지만 보통 한 명을 선택하기 마련인데 위소보는 다 가진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강희제는 위소보가 천지회 소속임을 알고 그를 이용해 천지회를 없애려 하지만 위소보는 천지회가 살 길을 열어준다. 반대로 위소보의 사부였던 진근남이 대만 정씨왕조의 공자에게 죽은 후 그 누명을 위소보가 쓰게 되어 양쪽 모두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자 위소보는 결국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사라진다. 이후로 그를 그리워하여 강희제가 해마다 양주에서 얼마간 머물렀다는 이야기와 함께 녹정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렇게 김용의 작품 세계도 끝이 난다. (물론 흐름상 이후에 서검은구록, 비호외전 등이 남아있기는 하다.)


  전통적으로 무협 소설의 주인공들은 의협심이 강하고, 기연을 통해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결국 절대고수가 되어 악을 처단하는 그런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위소보는 분명 특이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겐 그럴만한 성장배경이 있었고, 오히려 특색을 잘 살려 더 읽으면서 즐거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위소보의 어머니는 마지막에 그에게 위소보가 한인인지 만주족인지, 아니면 다른 소수 민족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인을 주인공으로 삼던 작가가 천룡팔부에서 거란인과 대리인을 주인공으로 삼더니, 녹정기에서는 아예 주인공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그에겐 청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도, 명나라를 다시 세워야 할 당위성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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