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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Dec 06. 2020

태풍 그 후

전북 고창 편

  친척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이 되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사촌 형은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나 혼자 빈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비나 조금 그쳐야 어딜 갈 텐데.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여행을 시작하려던 차에 큰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그래서 근처 순댓국집에 가서 점심으로 순댓국 특자를 하나씩 먹었다. 큰아버지는 조카와 술을 처음 마셔보신다며 기분이 좋으셨는지 옛날이야기를 잔뜩 하셨고, 소주 3병을 비우고서야 즐거운 이야기가 끝났다.


  점심을 먹고 정읍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서 고창 터미널에 도착했다. 거기서 잠깐 시내버스를 타고 고인돌을 보러 갔다. 강화도에도 고인돌이 있을 텐데. 고창까지 와서 고인돌을 보게 될 줄이야. 사실 고창에 왔는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정읍이라 자주 왔고, 군 복무를 장성에서 해서 많이 다녔는데 정읍과 장성 사이에 있는 고창은 처음이었고, 유명한 게 뭔가 봤더니 고인돌이었다. 그래서 고인돌 구경을 하러 갔다. 차가 없으니 버스에서 내려 꽤 걸어가고 나니 고창 고인돌 공원이 나왔다.


  박물관 구경을 하고 나면 실외에 있는 고인돌 유적을 보러 갈 수 있다. 고인돌뿐만 아니라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엿볼 수 있도록 모형을 잘해놓았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을 듯싶다. (살짝 무서워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아서 즐거웠다. 모형이 생각 외로 디테일해서 놀랐다. 보통 이런 곳은 모형들을 대충 만들어 구색만 갖추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라 날씨도 너무 좋았다. (아니, 더웠다.) 

  참고로 고인돌은 대략 이렇게 생겼다.


  고인돌을 보고 다시 머나먼 길을 걸어 차도로 나와서 버스를 타고 고창 시내로 돌아왔다. 마침 고창읍성에서 고창 모양성제를 한다는 문구가 여기저기 많이 있어서 어둑해질 무렵 고창읍성까지 구경을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깔끔해 보이는 모텔에서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혼자 묵는다고 사장님이 5000원 DC를 해 주셨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선운산(도솔산)으로 향했다. 선운산 도립공원은 동백으로 유명한 선운사가 있는 곳이다. 정읍 내장산도 안 가봤는데 고창 선운산을 먼저 가보다니. 산 입구의 안내소에서 물어보니 광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여 시간을 물어보고, 그 시간 내에 올라갈 수 있는 구간을 확인한 후 뜬금없이 등산을 시작했다. 


  전날의 태풍 덕분인지 길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물 웅덩이를 피해 가던 나는 무심코 물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푸르른 나무들이 물에 비추어 보였다. 전날 태풍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나는 사진을 찍고서도 한참을 머물러 물에 비친 하늘과 나무를 쳐다보았다. 피하려고만 했던 물 웅덩이가 오히려 멋진 광경이 되어주다니. 이것도 어쩌면 마음 가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조용히 나무아미타불을 외쳐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다시 걸었다.


  한참을 올라가 목표로 했던 도솔암 마애불상 앞에 도달했다. 내 목표는 정상이 아니라 선운산을 여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힘들게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도솔암에 가서 마애불상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고 했다. 이 불상은 높이가 15.6m, 폭이 8.48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라고 한다. 불상 명치 부분에 있는 직사각형 모양은 옛날에 검단선사가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고 한다. 조선말에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이 감 실을 열자 풍우와 뇌성이 일었다는 도술적인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며, 비결록 첫머리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오, 신기방기 하다. 물론 후세에 지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재밌었다.


  내려오는 길에 선운사 구경까지 마치고 광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날씨가 너무 깨끗하고 좋았다. 태풍은 싫었지만, 여행에 좋은 쪽으로 더 많은 효과를 미친 것 같았다. 언젠가, 동백꽃이 활짝 필 무렵에 다시 한번 선운사를 가보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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