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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Apr 09. 2020

입덕의 세계로 이끌어 준 십자 흉터의 사나이

바람의 검심 편

  고등학생이던 내가 슬램덩크를 보던 시절만 하더라도 만화책은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다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책방에서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많이 빌려다 보기도 했고, 때로는 축구도 해야 했고, 게임도 해야 했고, 놀기도 해야 했으니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던 어느 날, 우연히 같은 반 친구 C군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C군은 나와 꽤 친했는데, 집에 상당히 많은 만화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게 부러웠던 나는 C군의 집에 몇 번인가를 더 놀러 가게 되었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도 만화책을 모아야겠다고 말이다.


  만화책 소장을 결심하고 맨 처음 구매를 한 만화책은 C군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영접한 책이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의 시대를 다룬 한 검객의 이야기. 『바람의 검심』이었다. 

 

  바람의 검심은 메이지 유신의 최전선에서 유신에 앞장섰고, 검보다는 총과 화약이 전쟁의 중심이 된 시대에 떠돌이 검객이 된 히무라 켄신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고 곱상한 동안 외모와, 왼쪽 뺨의 사연이 담겨 있는 십자 흉터. 그리고 유신 이후로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듯한 역날검. 살생을 금하는 그는 우연히 도쿄에서 카미야 카오루를 구해 주고 그녀의 도장에 눌러앉게 된다. 하지만 칼잡이의 과거는 켄신을 자꾸만 사투의 현장으로 이끌고, 시노모리 아오시, 사이토 하지메를 거쳐 일본 전복을 노리는 시시오 마코토라는 붕대 검객을 상대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비공식 결전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평화가 아닌 인벌. 켄신의 십자 흉터에 담긴 과거의 인연과 함께 켄신과 그 주변을 공격하는 무리들. 그리고 다시 한번 벌어지는 켄신과 친구들의 사투를 담은 이야기가 바람의 검심의 주요 이야기이다. C군의 집에서 한 권을 읽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진 필자는 학교 근처 서점에 자주 들러 바람의 검심을 1권부터 차곡차곡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와 집이 멀어서 보통 방과 후 저녁을 사 먹고 학원까지 마친 후 집에 가곤 했는데, 덕분에 하루에 밥값으로 3000원의 용돈을 받았다. 이 돈으로 500원짜리 컵라면을 사서 저녁 끼니를 때우고 남은 2500원으로 만화책을 한 권씩 사는 식으로 바람의 검심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 그 만화책은 지금도 책장 한편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작품상에서 켄신은 일본 고대 검술 문파 중 하나인 ‘비천어검류’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비천어검류는 켄신의 스승인 히코 세이쥬로의 말을 빌리면 세상을 구하고 약자를 돕는 무적의 검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천어검류의 후계자는 결코 정치에 발을 디뎌서도, 정치적인 세력을 도와서도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켄신은 메이지 유신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구하기 위해 그 전란에 뛰어들었고, 너무 많은 살생을 한 켄신은 유신 이후로 자신의 공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부귀영화를 포기한 채 살인을 할 수 없는 역날검을 들고 지인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은 채 일본 전국을 떠도는 방랑 검객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규 교육과정에서 접하는 일본사는 대부분 삼국시대를 건너뛰고 막부가 성립된 시기를 시작으로 전국시대, 몇몇 막부의 성립과 패망. 서양 열강에 의한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그로 인한 동아시아 패권 장악. 이 정도 이상의 세세한 일본사는 다루지 않는다. 그나마 세계사를 공부하면 일정 부분 알 수 있긴 하지만 과거의 동양사 대부분이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중국에 비해 일본의 비중은 크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 바람의 검심을 읽다 보면 막부군, 유신군, 유신지사, 신선조 이러한 단어들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지 게임을 하다 보면 삼국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는 것처럼, 바람의 검심을 읽다 보면 일본의 역사에 조금 더 관심이 가곤 한다. 


  바람의 검심에서는 켄신의 실력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이미 시작부터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이라면 외려 켄신이 카오루의 도장에 들어간 이후 카미야 활심류 1번 제자로 영입한 묘진 야히꼬가 가장 큰 성장을 한다. 다만 켄신은 유신 이후로 칼잡이로서의 과거에 대한 속죄의 마음과 함께 신시대를 지키고 싶다는 불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데 끊임없이 그를 도발하고 과거의 죄를 묻는 도전자들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나 반성을 통해 불살의 신념을 완성시켜 나가는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고는 있다. 더불어 처음엔 적이었던 사가라 사노스케, 아오시, 사이토 등도 후에는 함께 싸우는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한창 바람의 검심이 인기 있던 시절, 비만 오면 우리는 교실 뒤편에서 켄신 놀이를 하곤 했다. 2단 우산이 놀이에 가장 적당했는데, 우산을 한 번 길이를 늘였다가 줄이는 동작을 하면 상대방이 검을 맞고 쓰러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검을 뽑는 장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검을 빼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는, 켄신의 비기 발도술을 흉내 낸 것이다. (참고로 극 중 켄신의 별명이 발도술의 달인이라는 데서 온 발도제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는데 당시엔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고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바람의 검심은 남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만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불살의 나그네. 떠돌이 검객. 역날검. 강자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를 위하는 정의의 사도. 작은 체구에도 뭔가 사연 있는 표정과 시작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검객. 시련에도, 때론 자신보다 강한 빌런의 등장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켄신은 내 인생 최고의 검객 중 한 명임에 틀림없었다.


  만화책으로는 28권에 달하는 이야기는 거의 90화에 육박하는 애니메이션으로도 일본 방영되었다. 필자는 너무 긴 이야기를 다 볼 자신이 없어 애니메이션은 포기하고 OVA만 챙겨 보았는데 <유신지사의 진혼곡>이라는 극장판과 켄신의 과거를 다룬 <추억편>,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성상편> 등이 있고, 2013년 <바람의 검심>과 함께 2015년 <바람의 검심: 교토 대화재편>, <바람의 검심: 전설의 최후편> 등 3부작의 실사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시시오 마코토와 겨루는 교토편까지를 다루고 있다. 교토 대화재편이 전설의 최후편과 연달아 나오는 바람에 다소 늘어지는 감은 있었지만 만화 원작에 대한 실사 영화 중에서는 제법 완성도 있게 나온 편이니 한 번쯤 영화로 봐도 괜찮다. 다만 만화의 퀄리티나 재미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바람의 검심으로 시작한 필자의 만화책 수집은 결혼 직전에 절정에 이르렀었다. 수 백 권의 만화책이 지금은 많이 줄고 줄었지만 많은 책들을 지금도 두고두고 간간히 꺼내어 읽곤 한다. 나에게 바람의 검심이란, 첫사랑과도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20년도 더 된 책들이지만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입덕의 시작을 이끌어준 바람의 검심은 아마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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