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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Apr 22. 2020

두 개의 심장

박지성 편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네덜란드의 명문 클럽인 PSV 아인트호벤의 감독을 맡았는데, 이 팀으로 왼쪽 수비수 이영표와 함께 오른쪽 공격수로 박지성을 점찍어 함께 했다. 2002년 월드컵 멤버 중에서도 벨기에에서 뛰는 설기현과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뛰는 안정환이 있었으나 16강전인 이탈리아전을 계기로 안정환은 팀에서 나와야 했고,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설기현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멤버들에게 병역 면제 혜택이 주어지면서 박지성은 군대의 부담을 덜고 이영표와 함께 네덜란드의 명문 PSV로 향했고,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쉽지만은 않았다. 이영표와는 달리 박지성은 팀에 녹아드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팬들의 야유에 입단 초기에는 히딩크 감독이 오히려 원정 경기 위주로만 박지성을 내보내는 상황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박지성은 네덜란드에, PSV에 적응을 했고, 나중에는 팬들이 그를 위한 응원가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진가를 유럽에 알린 것은 2004~2005년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였다. 유럽 챔피언스리그란 유럽 각 리그의 상위권 팀들이 모여 치르는 대회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자 가장 큰돈이 걸린 대회이다. 이 대회에 출전한 PSV는 사실 강팀으로 평가받지 못함에도 4강에 이르는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선수들과 함께 박지성, 이영표는 빅리그 스카우터들의 레이더망에 걸리게 된다.

  

  이영표가 한 발 빨랐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 토트넘으로 이적을 한 것이다. 당시 토트넘은 지금보다는 약간 순위가 낮았는데, 중위권 정도를 유지하는 팀이었다. 이영표가 뛰던 당시 어린 가레스 베일(현 레알 마드리드)이 이영표의 백업이었으니 당시 이영표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표의 이적과 함께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박지성에게 쏠렸고, 박지성은 당시 최장수 감독이자 최고의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경의 전화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라는 빅클럽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맨유는 EPL에서 최상위권의 팀이었다. 첼시나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가 재벌에게 인수되면서 최상위권의 팀으로 발돋움하기 전부터 맨유는 리버풀, 아스날과 함께 EPL 최고의 클럽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EPL 최다 우승팀이기도 했다. 그런 맨유에 박지성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용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뭐 비슷한 예로 중국의 동팡저우라는 선수가 맨유에 있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시 맨유는 퍼거슨의 아이들인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가 노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기에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망주의 티를 벗는 중이었다. 박지성은 긱스의 장기적인 대체자로 거론되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적응해나가면서 맨유라는 팀의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누가 알았을까. 평발이었던 선수가, 대학교 진학 당시 축구부 TO가 없어서 테니스부 TO로 힘겹게 진학한 선수가, 올림픽 대표가 되고, 월드컵 4강 멤버가 되고, 맨유의 일원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2005년 여름에 맨유에 입단한 박지성은 무려 2012년까지 맨유에서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동안 비록 많은 부상과 무릎 수술로 제대로 시즌을 소화한 것이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경기를 뛰어본 선수였고,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고, 2002년, 2006년, 2010년 월드컵에서 모두 골을 기록한 선수였다. 나도 주말이면 잠을 설쳐가면서 맨유의 경기를 챙겨 보고, 박지성이 골이라도 넣는 날에는 같이 환호했던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지금도 EPL을 보면서 손흥민을 응원하지만 아무래도 박지성이 뛰던 때만큼 열정적인 응원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익숙해져서일까? 내게 축구를 보여준 것은 월드컵이지만 축구팬이 되게 만든 것은 결국 박지성이었던 것 같다.


  그런 박지성에게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워낙 활동량이 많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오른쪽 윙어였지만, 오른쪽 왼쪽 가리지 않고 윙어로 뛸 때도 있었고,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으며 심지어 측면 수비수를 볼 때도 있었다. 맨유에서 주로 윙어로 뛰면서 ‘수비형 윙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축구에서 윙어는 공격수와 함께 공격적인 포지션인데 박지성은 적극적인 수비 가담과 함께 미친 듯이 경기장을 뛰어다니며 공수로 기여를 했기 때문에 수비형 윙어 또는 두 개의 심장이라고 불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맨유가 챔스 4강에서 AC 밀란을 만났을 때였다. 당시 AC 밀란의 키플레이어는 피를로라는 선수였는데, 그 팀의 모든 공격은 그에게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아예 박지성을 피를로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는데, 90분 동안 피를로를 밀착 마크하여 결국 승리를 따낸 일화는 유명하다. 나중의 일이지만 피를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상대하기 짜증 났던 선수로 박지성을 꼽기도 했다. 


  주말마다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박지성은 2012년 퀸즈 파크 레인저스(이하 QPR)로 이적했다. 당시 QPR은 말레이시아 거부 구단주가 인수를 하면서 첼시, 맨시티처럼 선수들을 높은 주급으로 영입하기 시작했고, 그 팀의 주장을 박지성에게 맡겼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는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었고, 맨유에서의 퍼포먼스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QPR에서 애매한 위치에 처한 박지성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유럽 생활을 시작했던 PSV 아인트호벤 임대를 선택했고, 1년을 뛴 후 선수로서의 생활을 마감했다. 그 이후로는 축구 행정가 과정을 밟음과 동시에 맨유 엠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혹자는 박지성을 여전히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맨유에서 주전급 플레이어라기보다는 로테이션 플레이어라고 봐도 무방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맨유가 강팀과 맞붙어야 할 때, 늘 퍼거슨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전술적인 이해도와 무궁무진한 활동량을 가졌고,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2002년은 홈이었다.)을 이끌기도 했다. 오죽하면 당시 실질적인 대표팀 감독은 박지성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필자에게 있어서 박지성은 여전히 우리나라 최고의 축구 선수이다. 누군가는 차범근을, 누군가는 손흥민을,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선수를 꼽을 테지만, 나에게 그는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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