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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Apr 19. 2020

다시없을 월드컵

2002년 한일월드컵 편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가 확정된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여태껏 월드컵에서 단 1승도 하지 못한 채 예선 없이 본선 32강 진출이 확정된 대한민국은 1998년 월드컵에서 우리에게 5:0이라는 대패를 안겨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를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초빙했다. 예선전이 없었기에 여러 평가전을 토대로 팀을 만들어가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황선홍과 홍명보를 주축으로 골키퍼 김병지, 이운재, 수비수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미드필더 유상철, 고종수, 이천수, 공격수 이동국,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 등 역대 최고라고 봐도 좋을 멤버들이 가득했고, 특히 안정환, 고종수, 이동국 트로이카는 한국 프로리그의 대표주자였기에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월드컵을 1년 앞둔 2001년. 필자가 고3 때 일이었다. 프랑스와 체코에 연달아 0:5라는 스코어로 패배하자 본선에서의 경기력을 우려하며 감독 교체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만 해도 체력은 좋은데 기술이 문제라던 한국 축구를 보고,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안된다는 히딩크의 이야기와, 쓰리백이냐 포백이냐를 놓고 계속된 포메이션상의 문제는 본선에서의 1승에 목이 마른 축구팬들에게 우려를 남기기 충분했다.


  심지어 월드컵 본선 개막을 앞두고 발표된 최종 명단에 고종수, 이동국이 제외되고, 홍명보 또한 거의 탈락될 뻔했다가 간신히 히딩크에게 머리를 숙이고 팀에 들어왔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목했던 탈락 후보인 박지성이 살아 남자 사람들의 우려가 극에 달한 순간.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킨 히딩크 감독은 본선 직전 평가전에서 주전 골키퍼 이운재, 수비수 최진철, 김태영, 홍명보. 중앙 미드필더에 송종국, 유상철, 김남일, 이영표, 공격수에 박지성, 황선홍, 설기현이라는 선수 구성으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 등과 괜찮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기다리던 2002년 월드컵이 개막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필자는 1차전 폴란드전을 친구들과 학교 야외광장에서 대형 스크린과 밴드부의 북소리가 어우러진 단체 응원 속에서 관람했다. 운명의 시합이 시작되고, 꽤 유기적으로 돌아가며 기대 이상으로 폴란드와의 승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던 대한민국은 지난 1998년 월드컵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황선홍이 선제골을 뽑아냈고, 유상철이 추가골을 성공시키며 2:0 완승을 기록했다. 당연히 첫 월드컵 승리에 온 대한민국은 환호의 도가니에 빠졌다. 


  미국과의 2차전은 낮 경기였는데, 아마 날이 밝아서 야외 스크린 관람이 힘들어 체육관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봤던 것 같다. 황선홍이 머리에 부상을 입어 1998년 이임생에 이어 또다시 붕대 투혼을 보였으며, 0:1로 뒤지고 있던 전반 38분 얻어낸 페널티킥을 이을용이 실축하면서 분위기는 암담해졌다. 다행히 후반에 이을용의 프리킥을 교체 투입된 안정환이 헤딩으로 넣으면서 1:1 무승부를 기록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과의 3차전. 상대방은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이었고, 그 이름도 유명한 피구가 있었다. 거친 경기가 계속되었고, 전반전 중반쯤 핀투가 박지성에게 양발 태클을 걸어 바로 퇴장을 당하고, 후반에는 베투가 이영표에게 거친 태클을 해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했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강했고, 위협적이었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의 세 중앙 수비수와 송종국, 이영표는 미친 체력을 과시하며 그들을 막아냈다. 그 사이에 박지성이 크로스를 받아 한 번 접고 상대 가랑이 사이로 골을 넣은 후 히딩크에게 달려가 안긴 장면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장면이다. 그렇게 월드컵 첫 승을 꿈꾸던 우리는 사상 첫 월드컵 16강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꿈에서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던 월드컵 16강. 상대는 멤버를 떠올리면 경악스러운 수준의,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였다. 골키퍼는 지금도 유일하게 현역 생활 중인 부폰. 수비수들은 말디니, 칸나바로, 네스타에 미드필더는 가투소, 토티가 있었고 전방에는 비에리, 델 피에로, 인자기가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칸나바로와 네스타는 16강전에 나오지 않았다.)


  16강도 마찬가지로 방학 직전이라 학교 야외광장에서 봤는데 경기 시작하자마자 얻어낸 페널티킥을 안정환이 실축하면서 분위기는 긴장되고 거칠어졌다. 심지어 전반 7분 만에 김태영은 비에리의 팔꿈치 공격에 코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왜 퇴장 안 줘. 홈 어드밴티지라며.) 그러다 결국 비에리에게 한 골을 헌납하고 후반전이 되자 분위기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여기서 히딩크는 홍명보까지 빼는 강수를 두면서 나중에는 황선홍, 설기현, 차두리, 안정환, 이천수까지 모두 공격에 투입하고 박지성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놓는 강수를 놓은 끝에 43분에 설기현이 천금과 같은 결승골을 뽑아낸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려던 나는 졸지에 환호하다가 연장전까지 보고야 말았다.


  연장전. 지금과 달리 그때는 골든볼 제도를 운영했기에 대한민국이나 이탈리아 어느 쪽이든 한 골을 먼저 넣으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시작부터 비에리에게 결정적인 찬스가 왔으나 비에리가 1994년 로베르트 바조 흉내라도 내듯 슛은 하늘로 떴다. 양 팀 모두 격해진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에이스 토티는 송종국과의 경합 과정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유도하다가 되려 퇴장을 당한다. 마침내 이영표가 올린 크로스를 안정환이 헤딩으로 넣으면서 사상 첫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날 밤새 사람들이 잠을 안 자고 기숙사를 비롯해 온 학교를 돌아다녀서 필자 또한 잠을 거의 못 잤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기말고사 또한 망친 건 당연했다.


  방학을 하고는 오히려 경기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8강에서 스페인에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고 4강에서 독일에 아쉽게 0:1로 패했다. 역사상 다시없을 월드컵 4강을 아시아팀 최초로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향후 한국 축구의 방향타를 크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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