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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Feb 26. 2024

백수 일기 다섯 번째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눈치 보여 죽겠다……. 내가 생각해도 나한테 잘못이 있긴 하다. 오늘은 아침에 엄마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할머니께서 대신 설거지를 하셨는데 그걸 하시는 내~내 날 욕하셔서 귀가 다 따가웠다. 내가 방에 버젓이 있는데 다 들리게 내 욕을 하신다. (이거 이 집 사람들 종특인가…라고 썼다가 난 아직도 이 집이 ‘이 집’이지 내 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구나 깨달았다.) 티브이를 보시면서 일곱 살짜리도 엄마 생각을 하는데 쟤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돼지 새끼처럼 처먹기만 하고(너무해…… 난 굳이 따지자면 저체중에 가까운 표준 체중이라고 물론 그 의미는 아니셨겠지만……) X신 새끼 등등…… 이랬던 적…… 꽤 많지만 그래도 요즘 빈도가 잦아졌다. 며칠 전에 외삼촌이 오셨을 때는 내가 방 안에서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한참 하셨다. 보다 못한 외삼촌이 그래도 생각이 다 있겠지 하고 날 감쌌다. (감사합니다……) 물론 그때도 가족들은 나 빼고 거실에 모여 있었고 나는 내 방에서 얌전히 자는 척을 했다. 요즘 내가 진짜 꼴도 보기 싫으신 듯싶다.


물론 내 잘못 인정. 이 나이 먹고 백수인 거 사죄. 집안일 안 하고 팽팽 노는 거 사죄. 근데 내 브런치니까 변명 좀 하겠다. 진짜 억울한 건 할머니께서 나한테 딱히 뭘 시킨 적도 없다는 거다. 나한테 설거지하라고 말했는데 내가 반항했으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지. 근데 그냥 가만히 내 방에 처박혀 있다가 욕이란 욕을 다 처먹다니. 물론 내가 처놀면서 집안일 안 하는 게 아니꼬울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 싫으면 면전에 대고 말하지 왜 반응하기도 애매하게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거란 말이냐. 그리고 이 변명은 좀 구차하지만 집안일은 할아버지도 안 하신다. 나보다도 안 하신다.


날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시지?! 나 그래도 손년데?! 심지어 집에서는 투명인간처럼 지내는데?! 눈치 보느라 양치하는 소리도 못 내고 칫솔을 30분 동안 물고 있었는데? 부엌에 누가 있으면 아무리 배고파도 문 밖으로 안 나가고 평소엔 눈도 안 마주치고 진짜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데. 그게 싫나. 그럼 나도 모르겠다…… 내가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진장 좋아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분들이 날 갑자기 무진장 좋아하셔도 의심만 하게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따로 나가 살기엔 돈도 없고 능력도 없다. 가만히 브런치에 뒷담 화하면서 버티는 수 말고는 생각 안 난다. 그래 포켓몬처럼 버티기 하자.


지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실에서 티브이 보면서 웃고 계신데 솔직히 나도 같이 마주 미워하고 싶다…… 근데 누굴 원망하기엔 너무 피곤하고…… 나도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긴 하고(그렇다고 심한 욕먹을 정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할머니께선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시는 거지(그러면 안 되지만… 나도 사람이고 듣는 귀가 있으니까…) 설거지하시기 싫으셨나 보지…


엄마가 나랑 외조부모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엄마는 평소에 내 흠결을 할머니께 있는 그대로 다~ 전한다. 나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걸 다 할머니한테 말한다. 그럼 할머니께서는 엄마 없을 때 그 얘길 내 앞에서 그대로 하시면서 꼽을 주신다. 그래요 두 분 사이좋아서 좋겠어요…… ……애초에 엄마가 날 데리고 외할머니 댁에 신세를 졌으면 안 됐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다 큰 16살짜리를 외조부모님이랑 살게 하는 게 순탄히 진행될 리가 없다. 외조부모님이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에휴 됐다 말해서 뭐 하냐 나도 그렇게 싫었으면 어떻게든 20살 되자마자 집을 나왔어야지 이 나이 먹도록 독립 안 하고 꾸역꾸역 버티는 것도 문제가 있어. 그만 생각해~ 이미 늦었어~


앞으로 있을 새로운 관계나 잘 쌓자. 언젠간 날 미워하지 않는 데다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랑 만나야지. 그러려면 내가 이것보다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해!!!

네이버 블로그에서 원피스 명대사를 퍼오다

지금은 내 집도 없고 내 가족도 없고 내 직장도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나를 지켜줄 동료가 나타날 거야^_^…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되겠거니.


어제 트위터하다가 봤다

이 말도 기억해 둬야지…… 할머니가 내 욕을 하면 그만큼만 아파하면 된다. 왜 내 욕을 하시지? 할머니랑 나는 왜 같이 살지? 할머니께선 왜 하필 내 방문 앞에서 욕을 하셨을까. 난 아픈데 할머니는 웃고 계시네. 이런 걸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브런치는 쓸 수 있어도 사람은 망가지기 쉽다. 브런치 딱 닫으면 생각 딱 그만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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