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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Mar 08. 2024

날백수 일기 여섯 번째

나는 엄마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번 달 말에 친구 생일이 있는데 걔 생일 선물을 빼놓고 예산을 짜버렸다~ 는 걸 어쩌다 엄마 앞에서 말했는데 엄마가 비웃었다. 뭐 돈이 있다고 예산을 짜냐는 거다... 그래요... 한 달 30만 원을 먹을 돈 놀 돈 카페 갈 돈 어쩌고저쩌고 천 원 단위로 나눠서 예산 짜는 내가 웃길 만도 하겠죠... 그럴 바에 그냥 일을 하라고도 했다. 그것 참 안 해도 되는 말인데 굳이 해서 나한테 상처를 주는구나 싶다.


난 엄마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난 그걸 진작에 깨달았다. 엄마도 내가 원하는 엄마가 될 수 없는데 내가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근데 엄마는 그걸 아직도 모르는 것 같아서 슬프다. 내가 양친 다(혹은 아버지만이라도) 멀쩡한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월급 받으며 일하고 집 하나 있고 차 하나도 있고 아들 딸도 하나씩 있는 집의 딸내미였으면 20세 인서울 4년제 대학 입학 24세 졸업 후 대기업 취직 30세 결혼 31세 득녀했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빠 없고 외조부모님 댁 옥탑방에 얹혀살고 못생기고 게으르고 가난한데 그렇게 살 수 있겠냐고~ 엄마~ 제발 엄마가 딸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말을 못 하겠다. 게다가 나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서 문제다. '정상가족'의 '정상성' 가득한 인생을 진심으로 원하는 건 아니고(저렇게 살아본 적이 있어야 원하지 난 원래부터 이랬어서 욕심도 별로 없다)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살았으면 엄마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저렇게 살고 싶다. 순도 100%의 내재된 효심을 발휘하여 저렇게 살고 싶다. 근데 이건 어디로 보나 나에게 있어서 좀 해로운 효심이 아닌가? 어차피 저렇게는 살 수도 없고 저런 생활이 맞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 행복한데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자 나에 대한 혐오만 생긴다.


어떻게 해야 엄마를 설득할 수 있는 걸까... 아마 못할 것이다. 엄마는 평생을 저렇게 살았는데 아마 앞으로도 내가 내 인생에 대한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는 비웃기만 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참 슬프구나... 엄마가 날 응원하고 내 행복을 바라주면 좋겠지만, 사실 그 일은 엄마가 원하는 방향의 인생을 살 때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더 오기 있고 끈기 있어서 아등바등 정상성의 틀에 날 깎아 맞추며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근데 엄마가 이렇게 낳았는데 어떡해... 엄마가 낳은 대로의 날 받아들여줘 제발... 이걸 브런치에 써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깨달아줘 봐.


슬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날 제일 사랑하는 건 1위가 나고 2위가 엄마인데 2위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1위는 2위가 1위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퍼서 나를 조금 덜 사랑하게 된다니... 악순환이다... 나에게 어지간한 일들을 털어낼 수 있는 성숙함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엄마 앞에서는 소용없어진다. 엄마가 나한테 줬던 상처를 하나하나 곱씹게 된다. 5살 때로 사고회로가 돌아간다. 엄마랑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다. 정말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난 경제적 독립도 못했지만 정신적 독립도 못한 것 같다. 어릴 때는 부모 탓하는 어른들이 한심해 보였는데 나도 이 나이 먹어서까지 자꾸 엄마 탓을 하고 싶어 진다. 이러지 말자... 브런치에 쓰고 잊자. 어차피 엄마도 안 바뀌고 나도 안 바뀐다. 사람은 안 변한다.


그리고 친구 생일 선물은 정말 큰 문제긴 하다. 이번 달 내내 달에 30만 원 이상 쓴 달이 없었는데 이번 달은 99%의 확률로 넘을 것 같다. 클립 스튜디오 연간 결제(84,000원)가 하필 이번 달인 게 큰 패착이다. 과장이 아니라 남은 한 달을 만 원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만 원의 행복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게 맞나? 다음 달 예산을 가불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자존심이 상한다. 이걸 어쩌지. 혹시 몰라서 응원하기를 열긴 했는데 수입이 는다고 지출을 늘리는 것도 하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응원해 주시면 잘 쓸게요)


아니 그리고 그냥 돈 관리가 재밌는 걸 어떡해? 내가 내 재산에 가계부 쓰고 예산 짜고 투자하는 걸 비웃는 사람들이 엄마만 있겠어? 10명한테 보여주면 9명이 꼴값이라고 할 텐데? 근데 돈 관리가 재밌다고 천만 원 있든 1억이 있든 관리하는 게 그냥 재밌다고~ 예산 딱딱 맞게 살면 쾌감이 든다고~ 난 돈을 벌든 말든 이 짓을 계속할 거라고~ 내가 날 예측해서 계획대로 사는 게 재미 중의 재미라고~ 평생 이렇게 살 거야 평생 가난해도 평생 쪼잔하게 1원 단위로 기록하고 카페 가면 적립하고 남은 돈 보면 전전긍긍하면서 날 육성 게임하듯이 키울 거야!!! 그럼 행복할 것 같다고~~ 적어도 토스 어플 들어갈 때는 행복할 거 아냐 그럼.


이제 그만 꼬장 부려야지. 근황을 적겠다. 근황을 안 적은 지 너무 오래돼서 뭐부터 적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림은 조금씩 그리고는 있는데 어디 팔 생각이 안 든다. 낙서만 하고 있기도 하다. 이 그림도 그릴 때는 아 힘들다 이만하면 됐다 하고 끝냈는데 이제 보니까 미완성도 이런 미완성이 없다.

네팔타리 비비 낙서... 사진 참고 쪼끔

글은 진척이 조금 있었다. 쓰고 있는 거에 하나 더 써볼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었다. 역시 장편을 잘 쓰는 작가는 단편도 잘 쓰는구나 싶었다. 네 가지 단편 중에 표제작인 <장미의 이름은 장미>가 가장 재밌었다. 작년에 뉴욕에 갔다 왔던 게 떠오르기도 하고 여러모로 완성도 높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참 중산층이나 기득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구나 싶기도 했는데... 이건 뭐 나처럼 없이 산 사람이나 거슬려하겠지 싶다. 난 가난이나 전쟁을 경험해 본 작가가 좋다.


영화도 몇 개 봤다. <필사의 추적>, <웡카>, <파묘>, <가여운 것들>. 다 영화관에서 봤다. <필사의 추적>은 영상자료원에서 주최하는 <대사극장: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라는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무료로 상영하는 걸 봤는데 재미는 없었다. 드 팔마 영화가 취향에 안 맞았다.

대사 극장에서 찍은 사진... 지금 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난 <메기> 진짜 좋아함)

나머지 세 영화들은 그럭저럭 볼 만했다. 셋 중에서는 <웡카>가 제일 괜찮았던 느낌. 근데 뭐 하나 가장 좋았던 건 없었다. 참고로 <웡카>는 할인받아서 9천 원에 보고 나머지는 문화누리카드로 봤다. <웡카>도 문화누리카드로 볼 걸 싶었다.


말해보카도 계속하고 있다. 58일 차다. 엄마랑 일주일에 두 번 요가를 다니기 시작했다. 청소년센터에서 한 달에 4만 원.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료. (인데 첫 달이라 그냥 결제했고 다음부터는 공짜로 다니려고) 요가는 중학생 때 학교에서 선택수업으로 1년 하고 대학 다닐 때 교양 2학점짜리 수업으로 한 학기 했었는데 그때는 억지로 듣는 거라 별 재미없었다. 그런데 웬걸? 돈 내고 다니니까 재밌다.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데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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