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한나 Apr 06. 2020

내 인생의 첫 번째 용기

시드니

 버우드 로드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시드니에 도착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던 2005년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15년 전, 풋풋했던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떨려되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를 걸었다. 어설픈 영어로 일을 구하고 있었다. 더듬더듬 거리는 나에게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도 통하지 않는 너를 우리가 왜 뽑아야 하느냐고 말이다. 당연히 힘들 거란 걸 알았지만 가지고 있던 희망을 포기 못해 문을 두드린 거였다. 그 차갑게 닫힌 문을 뒤로한 채, 난 멍하게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집에 돌아와 서글프게 울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처음으로 낯선 땅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건 20대의 나에겐 쉽지 않았던 도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던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큰 용기를 내었다. 막연하게 남몰래 내 안에 품었던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고, 잘하지 못하지만 영어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나는 휴학이란 걸 결심하고,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로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일하면서 영어도 공부하고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게 맘에 들어서 10개월 동안의 시드니행을 선택한 것이다.

부딪치고 때론 무시당하며 오기가 생겼다. 영어라는 게 이렇게까지 한 사람의 자존심을 망가뜨릴 수도 있구나, 피부로 느끼면서 더 잘 해내야겠다는 결심을 매일매일 했다. 한글로 된 책을 당분간 읽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영어로 된 책만 읽기 시작했고, 최대한 영어를 많이 들었다. 많이 듣다 보면 언젠가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감사하게도, 착한 외국인 친구들이 버벅거리는 나의 영어를 천천히 들어줬고 나도 그들의 친절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시드니의 아름다운 비치, 공원에 가면 많이 있는 크고 울창한 나무들, 지친 밤에 하늘 위의 빛나던 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고민 많은 청춘이던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 모르는 행인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반갑게 하던 게 좋았다. 별거 아닌 그 여유로움이,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친절이 시드니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원래 계획이었던 10개월은 13년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졸업을 한 뒤, 다시 호주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고, 직장생활을 했으며,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첫아기를 낳고, 작년에는 둘째 아이까지 낳은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이렇게 한 줄로 표현되는 삶을 사는 게 13년이 걸렸다. 이 한 줄로 담기 힘든 이야기는 천천히 세계여행 이야기를 하며 풀어낼 생각이다. 시드니로 여행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게 나에겐 첫 번째 용기였기 때문이다.

그 처음이 없었으면 지난 2년 남짓한 장기 세계 여행은 없었을 것이다. 삶은 결국에는 연결이 되고, 한 가지 선택이 또 하나의 선택을 몰고 온다. 첫 번째 용기는 나에게 두 번째, 세 번째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줬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지,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는 사람들도 없었고,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고, 돈도 충분치 않았다. 무모했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젊어서 객기를 부린 거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해서 참 다행이다. 세상을 향한 그 강렬한 호기심을 현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우리 둘 다 여행을 너무 좋아했고, 매년마다 새로운 곳에 가자고 약속을 하고 아기를 낳기 전까지 태국, 하와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체코, 스페인, 산토리니섬, 싱가포르, 베트남에 다녀왔다. 여행을 하면 수록,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점점 더 경험하고 싶은 나라가 많아졌다. 너네 아기 생기면 이제 그렇게 여행 못 하겠다는 말들을 우리는 거슬러 올라갔다. 첫째 아기가 태어나고 19개월이 되던 2017년, 우리는 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그게 가능할까 우리도 의문을 품었던, 아기를 데리고 떠나는 세계 장기 여행 말이다. 그 끝을 모르고 언제 어디로 돌아올지 모르는 물음표 투성인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드니의 모습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