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닥쓰담 Jun 24. 2020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1 [프롤로그 1]

마흔 살쯤 되면 세상살이가 좀 익숙해질 줄 알았다. 스무 살 때는 ‘아직 스무 살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서른 살 때는 ‘이제 겨우 서른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헤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흔이 돼도 여전히 사회생활은 힘들고, 자식은 10년을 키워도 모든 게 다 매번 처음 겪는 일 같고,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부모님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게다가 ‘마흔이나 먹고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그 자체가 나를 더 허둥대게 만들었다. 


그 즈음에 난 거울도 제대로 못 봤던 것 같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마치 내가 있는 줄 알고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기이한 모습을 내가 뒤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삶의 어느 시기에서도 열심히 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진심이 아닌 것으로 삶을 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게 남는 것은 언제나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 그리고 ‘아무리 해봐야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열패감이었다. 


참 이상한 것은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게 분명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나온 날들의 선택들을 하나하나 들춰 ‘이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여전히 같은 선택지를 집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잘못 살고 있는 건 분명해보이는데 뒤집을 선택은 없다? 이 모순이 바로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였다.      



MBTI를 만난 게 그때쯤이었다. 처음에 MBTI 검사를 하고 내 유형과 설명이 담긴 결과지를 받아 읽었을 때는 별로 큰 감흥이 없었다. 사주풀이를 봤을 때처럼, 어떤 부분은 맞고 어떤 부분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 한 사람의 성격을 몇 개의 문장으로 ‘아무개님은 이렇습니다, 이런 편입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이 내 삶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얼마 뒤에 MBTI 과정을 밟게 되었다. MBTI 과정을 시작하게 된 건 그즈음에 아이가 힘든 일을 겪고 있어서였다. 아이를 이해해보겠다고 시작한 건데, 과정 내내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자꾸만 중심에 들어왔다. 시작 초반에는 아이 아빠와 나의 관계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그게 관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부모와 나의 관계를 붙들고 늘어지게 됐다. 


나는 열 살, 다섯 살, 세 살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던 서른 몇 살의 내 부모를 이 측면에서도 보고, 저 측면에서도 보고,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어린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다음엔…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열 몇 살짜리 내 아버지, 누군가의 딸이었던 열 살짜리 내 어머니도 보였다. 마흔 몇 살 먹은 내가 그 아이들을 보고서는 뜨겁게 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다였다. 내 아이에 대해서는 이 아이가 무슨 성향인지도 특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냥 저 혼자 슬금슬금 힘든 상황을 벗어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뭐? 무슨 일이 있었어?’ 하고 묻는 것 같은 말간 얼굴이 되었다.      


이게 MBTI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처음에는 ‘이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반대성향이니 힘들었을 수밖에!’로 시작했다가, 점점 가족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또는 다른 어떤 관계 덩어리)에서 나 자신을 분리해내는 작업을 하게 되고, 그렇게 완전히 개별화된 개인으로 떨어져 나오고 나서 그다음엔 내가 떨어져 나온 그 덩어리에서 다른 구성원들 역시 하나하나의 개인으로 분리해내게 되고, 그렇게 전부 다 개인으로 떼어서 주욱 놓고 보니… 이런! 그동안 내가 직면하기 어려워서 인생을 돌고 돌았던 ‘바로 그 무언가’를 만나게 됐다.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를 원망하든 아니면 나 자신을 책망하든, 어쨌든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기가 맞닥뜨려 해결할 수 없는 뭔가를 끝까지 피해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감쪽같은 속임수다.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고, 끝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내 분노가 향하는 대상을 드러내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흔히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위로해주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고 해서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서, 내가 그걸 몰라서 이렇게 괴로웠던 게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위로해주기 전에 천만 번도 더 내가 나한테 말해주고 또 말해줬다. “니 잘못이 아니야” “너는 충분히 그럴 만했어…” 아무리 말해줘도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정말로 털고 일어설 수 있는 건, 다시 말해서 내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이 모든 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게 마음 저 밑바닥에서 받아들여졌을 때다. 그리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그 깨달음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연민이 나에게 베푸는’ 사면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 둘은 따로따로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모두들, 죽어라고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죽어라고 후회하고 자책하거나, 아니면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인생을 소모한다.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 상태에서는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찰흙 덩어리처럼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으로 떼어냈을 때 너와 나의 관계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렇게 ‘너’라는 개인들이 ‘나’라는 개인의 눈에 보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역설적이게도)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인생을 돌고 돌았던 ‘바로 그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그것을 다루고 해결하는 것은 그다음 몫이지만, ‘내가 결국은 다루어 해결해야 할 바로 그것’이 실체감을 가지고 내 의식 영역 안에 들어와 있게 된 것만 해도 이미 다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다. 



이 모든 여정은 덩어리에서 개인을 떼어내는 것, 거기에서 시작된다. 내 경우에는 MBTI를 통해, 개인으로 나를 떼어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게 다 ‘그냥 별 기대 없이’ 시작한 MBTI 과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  MBTI 교육과정에 어린 시절 자기로 돌아가보라든가 부모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 건 아니다. MBTI를 배우다 보면 자기 자신을 탐색하게 되고, 주변 관계로 탐색을 확장해나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W]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