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어떤 성향인가?
외향인가 내향인가, 감각형인가 직관형인가, 이렇게 둘 중 어느 쪽인가를 판가름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가 작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 놔뒀을 때의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어느 쪽인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오른손을 써야 된다고 수도 없이 지적당하고 훈련한 결과로 오른손으로 글씨 쓰고 밥 먹게 됐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대부분의 일에 자연스럽게 쓰는 손, 즉 눈썹을 그리고, 면도를 하고, 지퍼를 올리고, 요리할 때 칼 잡는 손이 왼손이라면 그 사람은 왼손잡이다.
오른손잡이 왼손잡이처럼 성향은 타고나는 것이다. 유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왼손잡이가 선천적이기는 하지만 유전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강력한 의지와 반복적인 훈련으로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바꿔놓을 수 있는 것처럼, 성향도 자기가 타고난 성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개발할 수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오른손을 쓰도록 엄격하게 훈육을 받아서 오른손을 잘 쓰게 되고 이제 왼손으로는 연필도 젓가락도 못 잡게 된 사람이, 어른이 돼서 처음 다뤄보는 위험한 도구를 잡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으로 잡는다. 왼손을 더 잘 쓰도록 타고난 신체기능은 바뀐 것이 아니라, 다만 더 개발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억제된 상태에 있었을 뿐이다.
성향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받은 훈육으로 어떤 행동과 태도가 아무리 몸에 익었다 해도 훈육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완전 새롭고 낯선 상황에서는 자기가 타고난 원래의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그게 자연스러운 자기 성향이다.
자기가 어떤 성향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부모의 영향이나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서 자기가 타고난 성향과는 반대쪽으로 발전한 경우에 그렇다. ‘예를 들어 감정형인 아이가 논리적 사고를 중요시하는 부모에게서 자랐을 경우, 그 아이는 논리적 사고를 발달시키도록 압력을 받았을 것이고 본래 타고난 성향인 감정은 억압되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가 사고형이 되지는 못한다’고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융의 제자)는 말한다. 폰 프란츠에 의하면, 이런 경우 나중에 압력이 사라지고 감정 기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마치 물로 돌아간 고기같이 본래 성향의 기능을 빠르게 획득해서 발전된 단계에 단숨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물로 돌아간 고기같이’ ‘단숨에’라는 이 표현에 나는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 누가 보더라도 내향적인 아이였다. 내향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특징을 다 갖고 있었다. 나를 보고 ‘어느 한 구석 외향적인 면도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외향 폭포 세례를 받은 것처럼 하루아침에 외향형이 됐다. 달라진 환경은 뭐였냐 하면, 중학교까지는 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먼 곳으로 가게 됐다는 것뿐이다. 전교생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시절이어서 아침에는 6시에 집에서 나가야 했고 밤에 11시는 넘어야 집에 돌아왔다.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에게 학교는 365일 공간을 제공했다. 그 덕분에 주말이고 방학이고 매일같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중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잠만 집에서 잤지 멀리 다른 지방으로 유학을 간 거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갑자기 외향성이 터져나왔다. 점차적으로 외향적이 된 게 아니라 마치 태어나서부터 그때까지 쭉 외향형으로 자란 아이처럼 그냥 단숨에, 누가 봐도 외향형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 외향적인 아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어설프게 외향형 흉내를 내본 적도 없었는데, 미숙하거나 어색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그냥 바로 자연스러운 외향형이 됐다.
그때까지 16년 동안 내향적 태도로 일관되게 차곡차곡 살아온 게 있기 때문에 내향적 특성 또한 나의 것이다. 그 후 몇십 년간 살아오는 동안, 나는 특별한 주변 여건에 따라 어떤 때는 내향형인 것처럼 살아야 할 때도 있고, 또 그냥 보통의 상황에서도 외향형의 특성과 내향형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내향형인지 외향형인지 헷갈리지는 않는다. 나는 외향형이면서, 내향적 태도가 요구되는 환경'에도 순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나는 내향적으로 살고 있을 때도 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지만, 외향형으로서 살 수 있을 때는 (불편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해방감을 느낀다. 고요하고 높은 창공에서 안정적인 기류를 타고 활공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질적인 차이가 확실하게 나는 경우에는 자기가 타고난 성향이 어느 쪽인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만약 양쪽 성향이 서로 팽팽하다면 그중에서 좀 더 '환경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쪽이 타고난 성향일 가능성이 더 크다. 요구에 부합되는 쪽은 필요에 의해 그만큼까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 성향인가를 판가름할 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어떤 성향에서든 그 성향 안에서 미숙하냐 성숙하냐를 따질 수는 있어도 성향 간에 어떤 성향이 더 낫고 어떤 성향이 더 못하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성숙이지 유형이 아니다. 어떤 유형도 미숙함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어떤 유형도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
위에 소개한 폰 프란츠의 말처럼, 본래의 타고난 성향에서라야 훨씬 더 쉽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혼란과 갈등으로 인한 지체 없이,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본래의 성향을 찾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 『융의 심리유형론』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 & 제임스 힐만, 어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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