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이 없는 안경을 쓸 때면
진한이는 가끔은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곤 합니다.
그것을 쓸 때면, 왠지 모르겠지만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관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내가 그들의 일상 속에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한 발짝 멀어질수록 세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커져가곤 합니다.
그렇다면, 알이 있는 안경을 써도 되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합리적입니다.
시력 교정이 필요한 경우를 포함해, 단순히 멋으로 쓴다면
알이 있는 안경도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알이 없는 안경이 주는 특별한 느낌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알이 있는 안경을 쓰면, 세상은 너무 분명하게 보입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알이 없는 안경을 쓸 때는, 그 명확함과 분명함 사이에 여백이 생깁니다.
그 여백 속에서 상상하고, 꿈꾸며, 현실을 넘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의 생활, 지하철에서의 고된 출퇴근,
회사에서의 반복되는 업무와 야근. 모든 것이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 무언가는 아마도 자신만의 진실일 것입니다.
진한이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다시 한번 알이 없는 안경을 써봅니다.
이번에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숨을 뱉으며 말합니다. “역시. 알이 없는 안경은 왠지 시리구나.”
“네 말씀하세요.” 조용한 방 안의 시리가 답합니다.
시리도 때론 진한인가 알이 없는 안경만 찾진 않을까 괜스레 말을 겁니다.
알이 없는 안경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세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웬일인지 내일 출근길에는 안경을 쓰고 가려고 합니다.
그저 세상을 뚜렷이 바라보고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길거리의 담배꽁초, 울분이 가득한 표정, 시골에는 존재하지 않는 노숙자를 바라보려 합니다.
진한이는 오늘의 회고를 끄적이며 내일을 위해 잠이 듭니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