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밀레니엄시대 전 후 KTF라는 통신사가 있었다. 혹시 알고 있다면 'KTF적인 생각'이란 CF도 기억나지 않을까? 일반인들에게 ' KTF적인 생각'이란 1차 수기공모를 시작으로 이후 2차, 3차 공모가 이어졌었는데 그 1차 대상 수상자가 나였다. 당시 대상 상품으로 400만 원 상당의 파브 tv였는데 너무 커서 거실을 꽉 채운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2차부터 '어디 사는 00님의 사연'이라며 본격적으로 사연 시리즈가 CF로 제작되어 나의 사연은 1회 대상자란 영광이 무색하게 나의 기억 속에만 자리하고 있다.
그전부터 글쓰기 공모 외 라디오 사연당첨으로 화장품, 쌀, 상품권등 살림에 보탬이 되는 굵직한 상품들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교 때는 교내 글쓰기 장원 등 상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운이 좋은 건지 글쓰기 재주가 있었는지 썼다 하면 어디서나 잘 채택되는 편이었다. 그런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얘기를 하려면 조금 특별하고 암울했던 중학교시절을 마주해야 한다.
난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언니오빠를 떠올리면 싸운 적도, 혼이 난 적도 없이 이것저것 받은 기억만 가득한 착한 언니오빠들이다. 문제는 그렇게 사이가 좋았음에도 나의 청소년기에 엄마를 비롯해 그 누구 하나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배 타시는 아빠, 대여섯 개의 밤(夜) 가게를 꾸리시는 큰 손 엄마, 결혼 한 큰 언니, 공부하러 절에 들어간 오빠, 배구선수로 타 지역에 사는 작은 언니. 그렇게 각자의 삶을 충실한 덕에 나의 중, 고등학교시절 통째로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지내는 나날이 다반사였다. 새벽에 들어와 잠든 엄마의 굳게 닫힌 안방을 뒤로 등교하고, 하교 후에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오롯이 혼자 잠들기를 반복했다. 급식을 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 나의 도시락은 아침 구멍가게에서 사가는 1000원짜리 참치캔이었고 친구들이 싸 온 밥을 같이 먹으며 참치캔이랑 반찬을 나눠먹었다. 그나마 도시락을 싸서 다닐 때가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아빠 배가 들어온 삼사 일간은 아빠표 도시락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계란말이, 소시지반찬등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따뜻한 도시락이었다.
"와~너네 아빠 들어오셨어?" 나의 밥보시의 일인자였던 단짝 유니는 참치캔도 좋아했지만 아빠가 싸준 도시락을 한 없이 반겼다. 아빠는 참 무뚝뚝하셨지만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셨다. 맛집으로 소문난 엄마 가게보다도 매운탕만큼은 더 맛있었고 항상 잠들어있는 엄마대신 나에게 푸짐하게 식탁을 채워주는 이는 아빠였다. 무엇보다 맛과 비주얼 모두 만족시키는만점짜리 도시락을 싸주는 아빠라니.아빠가 안 계신 유니에게는 도시락 하나만으로이상적인 아빠상이었으리라 짐작한다. 하루는 그림과제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니를 우리 집에 초대를 했었는데 10분 후에 오라며 동 호수를 알려주고 후다닥 먼저 집에 들어와 친구맞이 방정리를 하고 있었다. '딩동~' "누구요?" 하고 아빠가 문을 열어주는 소리와 함께 바로 "어?! 앗! 죄송합니다!"라고 황급히 달아나는 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유니야!" 하고 뛰쳐나가 옆집을 기웃거리는 친구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었다. 아빠가 집에 계시다는 것을 유니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나 다른 아빠의 비주얼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183cm의 큰 키와 덩치. 누가 봐도 구릿빛 그을린 피부의 우락부락한 영락없는 뱃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유니는 아빠표 도시락에서 그동안 나름의 세련되고 날렵한 외모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닮은 꼴 마도로스를 상상하고 있었으니 첫인상에 놀랄 만도 하다. 두툼한 손으로 깎은 예쁜 아빠표 사과를 먹고 간 유니는 뒷 날 반전 매력의 아빠이야기로 학교에서 종일 떠들어 댔다. 진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유니는 그 이후 간간히 아빠가 집에 계신 날 놀러 와 수다쟁이 면모를 보이며 아빠 기를 쏙 빼놓고 갔다. 아빠도 말 많은 유니가 신기하고 재미있으셨는지 그런 유니를 보고 한 번씩 허허 웃어주셨다. 그렇게 20년 동안 아빠는 유니를 말 많은 친구라 부르셨고 유니는 아빠에게 살가운 딸이 되었다. 그리고 유니는 나와 함께 아빠의 마지막을 지켰고 장례식장에서 누구보다 하염없이 오래 울어주었다.
아빠가 배 타러 나가시면 또다시 집에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필 그때가 나의 내면의 소리에 더 집중할 중2 때였다. 마치 내가 곧 사라질 것만 같아서 딴에 시작한 것이 바로 '유서'쓰기였다. 물론 어떠한 시도 없이 심정만, 표현만 그랬다. 집에서도 자존감이 바닥인데 중학교 생활 또한 좋았을 리가 없지. 재미없는 학교이야기, 혼자 있음에 외로움이 사무치는 이야기. 아침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집에서 말 한마디 섞을 사람이 없다는 야속한 삶의 대한 시를 쓰고 유서를 썼다. 내가 죽으면 누가 그 노트를 볼까 봐 사전을 찾아 틀린 글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어떤 표현이 좋을지 고민하며 정말 매일밤 정성스레 열심히 써 내려갔다. 자아실현을 위한 첫 아웃풋 작업이었던 셈이다. 사실 고오를 낳기 전까지 그 방임에 대해 엄마에게 일말의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학교생활, 성적에 대한 관심은 물론 밥은 챙겨 먹는지 전화 한 통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써 내려간 그 두 권의 유서노트는 다행히 고등학교 입학 후 서랍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같은 취미와 특기를 가진 한 반 가득한 마음 맞는 친구들이 좋았고 공부가 즐거워 시험을 손꼽아 기다리는 공붓벌레가 되었으며 심지어 타고 다니는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대감을 느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과 감정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나의 고등학교시절은 칙칙한 우물 안 개구리가 어느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봄날, 처음 세상과 마주한 그 놀라운 순간이라 표현하고 싶다. 지금은 그때의 어린 나를 달래 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조금 외로웠지만 크게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고 밤새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던 그때.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던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