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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Oct 12. 2024

그저 바다를 보러 왔다.

영원히, 물 (Forever & Water)

그저 바다를 보러 왔다.
'그렇게 바람이 차가워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이유는 없다. 너는 그저 바다를 보러 온 것이다.'
<'휴식의 말들' 중, 공백>

두 손과 두 발로 안간힘을 써도, 내 힘으로 아무것도 잡을 수 없고 의도대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파란 액체 속에서 헤엄치는 순간을 좋아한다. 때로는 물에 푹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본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이번 여름휴가에선, 포르투갈의 뜨거운 남부 도시 'Lagos'의 해변가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하필이면 주말과 성수기가 겹친 날에 고속도로로 몸을 실었던 탓에, 4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두 배가 걸려 라고스에 도착하는 것으로 휴가가 시작됐다. 라고스로 오기 전 여행했던 포르투, 리스본 등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남부의 모습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새로워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새 여정지에 도착한 다음 날, 곧바로 찾아간 곳은 숙소에서 20분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Praia da Luz' 해변이다. 참고로, 평상시 잘 걷는 필자임에도 불구하고, 체감 37도가 가까운 날씨에서 10분 이상 걷기란 큰 결심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피부색이 하루가 다르게 진해지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하얗게 칠해진 마을들 사이를 미로 찾듯이 걸었다. 마침내, 또렷해지는 파도소리와 신난 아이들의 소리, 건물들 틈 사이로 진한 파란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위에 지쳤던 두 다리는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활기가 돌아 성급해졌다. 포르투와 리스본에서도 매일 바다와 함께 했음에도, 라고스의 바다는 마치 해변을 처음 만난 듯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루즈 해변은 거뭇거뭇한 거대한 절벽이 해변의 양 끝에서 우뚝 서있어, 대서양에 마치 살포시 안겨있는 모습이었다. 


정수리를 얼른 감춰야 할 듯한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과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선베드를 관리하는 직원에게 큰 마음을 먹고 다가갔다. 바다를 더 안전하고 오래 즐기기 위한 변명으로, 일명 '유료 선베드 사치'를 부려봤다. 이전까지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찼기에 파라솔이 없어도 괜찮았지만 해가 정점에 있는 한낮의 라고스는 도저히 파라솔 없이 해변을 즐길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유료 선베드와 맞바꾼 가벼워진 몸과 마음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후, 누웠을 즘엔 오전 11시였다. 해가 하늘의 꼭대기에서 내려가고, 서서히 바람이 불어와 물기가 사라진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할 즘에 시계는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홀로 낯선 타국의 해변에서 5시간을 보냈다니. 그것도 재미있게 말이다. 본인도 많이 놀랐다. 이 정도로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일 줄이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롯이 바다에서의 시간에 녹아들었다. 그저 바다를 보고 느끼면서. 그날 바다를 보러 왔던 욕구를 충족시키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낀 모래를 툴툴 털기 위해 연신 옴짝거리다 일어났다. 최대한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인근 식당의 문이 닫히기 전에 일어나야만 했다. 저녁만 아니었더라면, 한두 시간은 더 있다 왔을 텐데. 다음에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 날엔, 저녁도 싸들고 가야겠다. 


2024. 08. In La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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