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23
결국에 나는 아내와 서로 독립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중간에 잠시 기대에 부풀었던 시간도 없지 않았고, 아내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매주 상담을 반복하면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고 아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최선은 다해 보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고, 지금 나는 이혼을 기다리며 아내와 별거하는 중이다.
여전히 약을 먹고 상담도 다니고 있다. 힘들어 하는 시간 속에서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낸 건 네가 아니었냐며, 네가 이혼을 결심했을 때의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 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내가 이혼을 결심했던 까닭을 돌이켜 보는 것은 내가 회복하는데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먼훗날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이 결정이 아내의 생각대로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최선일 수도 있기에,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난 예감, 징조 이런 것에 민감한 편이다. 아내와 결혼했던 지난 2017년 현충일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는 한 해 전 6월 5일 처음 만났었는데 그날 날씨가 6월치고는 시원했고 쾌청했던 것과는 달리 2017년 현충일은 상당히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결혼식은 잘 마쳤다. 손님도 많았고, 의외로 나는 그런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을 무척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신혼여행지로 출발하기 위해 공항버스를 탔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종점이었던 우리집에서 인천공항까지 손님은 아내와 나 둘뿐이었다. 그게 천만다행이었던 까닭은 아내가 신혼여행을 가는 길에 지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별로 좋은 출발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걸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그때 나는 침착하게 아내에게 생각을 돌이켜 볼 것을 권유했고 아내가 분명히 버스에 탈 때까지만 해도 지갑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손님은 우리 둘뿐이었고, 평소에 나는 버스 어플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버스회사에 전화해서 버스번호를 알려 주고 버스 안에 흘려진 지갑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버스에서는 남겨진 지갑이 하나 있었고 손님이 나와 아내 두 명이었던 까닭에 그 지갑은 분명히 아내의 것일 터였다. 침착하게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아내와 나는 비행기가 뜨기 전에 지갑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 없이.
을씨년스러웠던 날씨에 지갑까지 잃어버렸던 아내를 보며 결혼생활의 출발이 좋지 않다는 예감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게 현실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갑 분실 사건을 잘 해결한 덕분에 그래도 찜찜함을 조금 해소한 채로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쉽게 내뱉으면 안 된다. 아내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겠지만 덕분에 우리는 결혼하고 나서 3년 동안은 몇 차례의 다툼을 거쳤음에도 단 한 번도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결국 아내와 이렇게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세 차례 정도 내가 이혼을 언급한 것에 대해 많은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횟수가 지나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예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고 그래야 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혼을 입에 올리면서도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 어찌 보면 나와 아내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꺼냈기에 그 무게감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빈번하게 꺼냈더라면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갔을 수도.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3년의 신혼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고맙게도 아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자신이 살면서 다시 또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첫 신혼집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두 배 정도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결혼생활이 틀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랑이 부족하고 모자랐던 것이겠지만.
이사를 하면서 나도 회사가 많이 멀어졌지만 아내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 신혼집에서 나는 아내가 아직 일어나서 씻기도 전에 출근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만큼 아내가 회사까지 가는 길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를 간 뒤로 비록 우리가 사는 집은 넓어졌지만 아내는 출퇴근에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소모하게 되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을까. 이제는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나 또한 하루에 2.5시간 정도는 출퇴근하는데 들이는 편이었기에 아내가 힘들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출퇴근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거다. 3년 정도 신혼생활을 거치면서 아내도 나에 대한 흥미도 줄어들었을 거고, 권태기가 찾아올 때도 되었다. 우리는 [눈물의 여왕]에 나오는 백현우나 홍해인처럼 서로 죽지 못해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맞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두세 달이 지나면서부터 아내에게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 눈에 보였는데 문제는 아내와 나의 성향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데에 있었다.
나는 성격이 상당히 예민한 편이라 아내에게 권태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문제를 아내와 이야기해서 풀고 싶었고, 아내의 생각이나 마음이 궁금했다. 반면 아내는 권태기가 찾아온 것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성향이었다. 그걸 일탈로 풀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마 아내도 어쩔 줄을 모르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집에 오기 전에 잠을 잤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내는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그 문제에 대해 지적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한 번은 새벽 3시가 넘어서 들어온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다 지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지만 어찌 보면 이해를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인생을 쭉-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일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일탈을 용인한다 해도 횟수가 늘어나고 시간이 점차 늦어지면서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잠시만 참고 눈 감아 줬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아내도 내게 없었던 신뢰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술 먹고 사고 치고, 집에 늦게 들어오고 이런 일이 전혀 없는데 도대체 아내는 왜 그럴까 하는 생각만 반복되었고 결국 결혼하고 3년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었다.
그때만 해도 아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며. 몇 차례의 다툼을 거치는 가운데 우리는 결국 화해하고 봉합하기는 했던 것 같은데 이제와서 돌아보면 그건 정말 '봉합'일 뿐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아내의 권태기는 그렇게 지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나에게 식은 애정과 호기심이 돌아왔던 건 아니었고 그건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차은우는 아니지 않는가. 어쩔 수 없다고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뭔가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부부란 그냥 그렇게 서로 익숙해지고 무던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싶다.
여전히 나는 아내의 출퇴근거리가 멀었던 게 우리가 이혼하게 된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어쩌면 그저 밖에서 핑곗거리를 찾고자 한 것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출퇴근이 멀고 힘들어지면서 아내와 같이 보내고 대화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아내도 피곤했을 것이다. 특히 퇴근시간 같은 경우는 딱 퇴근시간에 퇴근하게 되면 차가 너무 막혔기 때문에 갈수록 아내가 귀가하는 시간이 뒤로 미뤄졌다. 6시에 퇴근하면 2시간이 걸리지만 9시에 출발하면 1시간 내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침에도 충분히 일찍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이해해 줄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평일에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은 정말 손에 꼽는 일이 되어 갔다.
그러다가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작년 삼일절 연휴에 아내와 같이 나트랑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혼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우리가 나트랑만 가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3년을 기다려서 출발한 오랜만의 해외여행이었지만 나트랑으로의 여행은 최악이었다. 해수욕을 좋아하는 아내 때문에 가게 된 나트랑이었는데 날씨가 내내 좋지 않고 풍랑이 몰아쳐 해수욕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여행하기 좋았던 2월 말 3월 초의 베트남이었지만 내내 바람이 많이 불고 흐리고 쌀쌀해서 리조트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내는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날씨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는 사람이다. 나는 아내도 그런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트랑에서 겪었던 최악의 날씨가 우리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4박 5일의 여행이었는데 '뭐라도 하자'고 하는 나와 피곤하니 자신은 방에서 쉴테니 '너라도 편하게 해'라는 아내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고, 마지막날에는 이게 완전히 터지고 말았다. 권태기 때처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돌아오는 날 기분이 좋지 않은 티를 완연히 내었고, 그러면서도 명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서 나는 더욱 곤란했다. 나 또한 나트랑에 있는 내내 별로 기분이 좋고 신나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의 그런 부분을 받아주지 못했다.
훗날 시간이 지나고 다른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나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아마 평범한 남자 같았다면 그런 아내를 보면서 '아니 왜 저래?' 그냥 이러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둔한 사람 같은 경우에는 아내의 그런 불쾌한 기색조차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실은 아내가 그런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웬만한 여자보다도 내가 더 예민한 편이어서 그런 부분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트랑공항에서부터는 우리 사이에 엄청나게 싸늘한 공기가 지나갔고 그런 상태로 비행기를 타고 같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아내가 부부상담을 받자고 이야기했다.
지난 결혼생활 사이에 이혼 이야기가 세 번 있었다고 했는데, 아내는 두 번째는 본인이 먼저 꺼낸 것이라고 했다.(나는 두 번만 한 셈이다. 잘했다는 건 아니다.) 이때 아내가 했던 이야기가 부부상담을 받고 완전한 하나의 부부가 되던지 아니면 갈라서던지 하자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아내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판에 아내의 그런 제의를 듣고 나서 내가 극대노했던 게 생각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나트랑에 다녀온지 일주일만에 부부상담에 돌입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