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nest Apr 17. 2024

아내의 마지막 모습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22

아내와 각자 살 집을 구하면서 재산분할을 해야 했다. 우리는 6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살았지만 통장을 합친 적이 없는 탓에 재산분할과정에서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내 주변에 있는 이혼전문변호사 형이 이야기한 현실은 달랐다. 그 형은 처음부터 나에게 후보 계획도 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각자 가진 재산대로 분할한다는 건 내게 꽤 유리한 조건이니 그것도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결국 실제로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던 재산은 각자가 가지고, 함께 살던 집의 전세보증금에서 아내가 보태주었던 돈만 아내에게 돌려주는 정도로 합의를 보았다. 아내는 이혼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재산분할에서는 특별히 욕심을 부리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정확히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몇 년 전부터는 나보다 월급도 많았지만 아내는 나보다 씀씀이가 큰 편이어서 나만큼 저축을 하진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아내는 투자를 잘한 편이었다.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미국 주식에 투자를 했고 코치코치 캐묻진 않았지만 아마 수익률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아내는 오랜 유학생활과 작가생활을 거쳐 실제로 경제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별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미국 주식은 장기적으로 보유할 생각인 것으로 보여 당장 팔 생각은 없는 듯했다.


반면에 나는 저축만 따박따박한 스타일인 데다가 특별한 씀씀이도 없어서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니 돈을 꽤 모은 셈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 지은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아내는 가지고 있는 주식 등은 처분하지 않는 선에서 집을 구하다 보니 오래된 구축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집의 크기도 달라서 나는 그래도 방이 2개 있는 아주 작지 않은 아파트인 반면, 아내는 우리의 신혼집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방 1개에 하나의 안방 겸 거실을 갖춘 구조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조차도 전세대출을 거의 풀로 당겨서 입주할 수 있었다.




브런치의 글만 보면 아내에 대한 내 사랑이 엄청 애틋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위선자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정말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정성스러웠다면 모든 걸 다 주고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내 주위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하려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더 고약한 건, 아내가 만약 나보다 더 좋은 집, 더 넓은 집, 더 좋은 환경으로 이사했다면 아마도 나는 속상했을 것 같다. 이혼전문변호사인 형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새로 집을 구하면서 나는 계속 '실패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 데에 엄청 집중했다. 그런데 만약 아내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동네에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내가 무척 실패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지금보다도 훨씬 더 우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아내와 내가 들어갔던 신혼집은 그때 당시 지어진지 25년쯤 된 구축 아파트였다. 내부를 올수리해 주는 조건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막상 들어간 집은 깔끔했고,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녹물이나 이런 이슈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살면서 샤워기나 세면대에 필터를 끼고 살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실제로 대학생 때 녹물이 나오는 집에 살아본 적도 있지만 그때도 필터를 안 끼웠었네. 그땐 끼웠어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형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다른 아파트에 살았는데 녹물 때문에 필터를 끼우고 생활한다며 우리 집은 정말 괜찮은지 물어보곤 했었다. 녹물이 펑펑 나오는 집에 살 때도 필터를 안 끼웠던 젊은 시절의 경험 때문인가... 나는 신혼집 수도는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잘 살았던 것 같다.


아내는 나와 이혼하면서 우리의 신혼집과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연식을 가진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 전날 나는 아내가 샤워기와 부엌 등에서 쓸 수많은 필터를 사 와서는 서랍장에 넣어 두는 것을 보았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내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더 열악한 조건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나와 헤어지는 쪽을 택했다. 나 또한 아내와 살았을 때에 비하면 삶의 조건이 열악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보다는 아내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아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정작 아내가 그렇게 이전만 못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 (이혼과정에서) 내가 좀 더 양보하고, 아내를 좀 더 챙겼더라면 아내는 분명 더 나은 여건에서 살 수 있었을텐데, 아내를 엄청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가식적인 나의 모습에도 치가 떨린다. 지금도 나는 방금 전까지 혼자 회의실에 가서 소리를 죽여 가며 펑펑 울다 왔지만, 그렇게 울 것 같았으면 진작에 아내에게 양보하고 더 신경을 써 주지 그랬냐. 현실적으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면서. 이런 가식덩어리 같으니. 나 자신이 정말 혐오스럽다.




아내와는 가끔 잘 지내느냐며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지난번 정신과 진료 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안 좋게 헤어진 것보다 좋게 헤어진 게 훨씬 낫다며 위로를 건네셨지만, 막상 정말 안 좋게 헤어지면 서로 치가 떨려서 아무런 정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고, 과거가 그립지도 미화되지도 않는다던데, 우리는 좋게(?) 헤어지고 있어서 나는 늘 미련과 여운이 가득 남아 마음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이젠 많이 나아졌고, 약도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씩 이렇게 한 번 훅- 하고 우울한 감정이 올라오면 정말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면 내가 분명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불과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아내의 마지막 모습만 떠올리면 쓸쓸하고 미안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서 내 감정이 쉽게 컨트롤되지 않는다.


먼 길을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가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