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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May 15. 2024

내가 이혼을 결심하였던 까닭은 2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24

특별할 것이 뭐가 있겠나. 너무 교과서적인 답이어서 이렇게 말해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명백한 이유여서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결국 우리 부부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나이 마흔둘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너무 세상 모르고 철 없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은 그 모든 걸 극복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돈이 없고 힘들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늙고 병들었어도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가능하도록 해 준다. 물론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사랑만이 다는 아니라는 걸.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친다고. 그러나 나는 그 경우조차도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걸 이겨 낼 정도의 사랑이 있었다면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가끔은 요즘 젊은 세대의 많은 중산층 부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하곤 했었다.


저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걸 함께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부부가 얼마나 있을까. 다들 별일 없고, 적당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으니 지금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당한 나이에 적당히 맞추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나는 저런 생각을 내심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나 보다. 그 커플에 나도 해당되는 줄은.




신뢰와 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낼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잘 아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힘들어 할 수도 있겠지. 수없이 한탄하고 끊임없이 힘겨워하고. 그렇더라도 내가 사람을 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건 아내의 경우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아내의 가족들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처가의 부모님은 여전히 댁에서 할머님을 모시고 사신다. 그래서 처가의 어머님께서는 많이 힘들어 하시지만. 같은 상황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어떨지도 생각해 보았다. 한 분만 남겨진다면 결국 우리가 함께 모시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아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내게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아내는 나를 어떻게 대할까. 내게 갑자기 큰 병이 생긴다거나 사고가 난다거나 하면. 한때는 아내가 가계를 책임질테니 회사를 그만두고 박사과정에 진학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때 아내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내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내 평생을 책임진다고? 나는 내게 큰 병이 있거나 사고가 났을 때 과연 아내가 나를 정말 끝까지 책임질지 믿음이 가지 않는 편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회사의 조건에서 오는 차이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비록 좋소지만 고용이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고, 아내 회사는 좋소답게 고용의 지속성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니.




신혼 초에는 분명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거기에서 오는 행복감도 상당했다. 그런데 첫 번째 권태기가 지나간 다음부터는 아내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몇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2년 전, 아내와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가기 전이었다. 수요일 비행기였는데 나는 월요일과 화요일 내내 열이 끓고 몸이 좋지 않았다. 검사는 해 보지 않았지만 어쩌면 코로나였을지도 모른다. 이제와서야 이야기하지만 혹시 휴가를 가지 못할까 싶어 검사도 해 보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니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와서 바로 잤던 생각이 난다. 아내가 퇴근해서 집으로 오는 줄도 모르고 잤다. 수요일에 제주도로 출발할 때는 그래도 많이 나아진 상태였는데 그때 아내에게 열이 심했고 아팠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내는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많이 서운했던 것 같다. 내가 분명히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 아내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도 이야기했었다. 내가 8시밖에 안 돼서 잠을 잤는데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했느냐고.


눈이 엄청 나게 내리던 날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나와 달리 자가로 퇴근하는 아내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마음으로 걱정만 하지 말고 한 돈 10만 원 부쳐 주고 회사 근처 호텔에서 자라고 했어야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아무튼 집에서 혼자 벌벌 떨면서 아내가 무사히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아내에게 차가 미끄러진다는 전화도 받았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귀가한 아내를 꼭 안아 주었는데 아내는 빙판길에 대해 불평하면서 '이건 뭐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사람은 내가 걱정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통영에서 한 달 살이 할 때 아내가 첫 주에 와서 같이 있다가 서울로 떠나던 날에도 나는 거의 울 뻔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아내도 나와 헤어지는 것에 좀 서운해 하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아내는 정말 씩씩했고, 좀 과하게 말하면 '아, 이제 귀찮은 일 다 끝났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아내는 지난 4년간 나와 우리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을 버리지는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입원하셨을 때도 나 혼자 일주일 내내 간병하는 건 힘들다며 하루는 와서 교대해 주었고, 우리 가족 행사나 동생네 집에 놀러가는 일 등에도 군말않고 함께해 주었다. 다만 나는 거기에서 그 어떤 다정함도 느끼지 못했다. 아내는 보통 나의 고향집에 내려가면 방에서 오래 잠만 자는 편이었고, 동생네 집에 놀러가도 피곤하다고 방에 들어가서 누워 자는 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지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아마도 내가 지나친 것이겠지만 난 아내 없이도 혼자 처조카를 보러 간 적도 여러 번이다. 처남의 회사 사람들마저 신기해 할 정도로. 처가는 우리집과는 달리 가족모임도 잦고 행사도 많은 편이었는데 난 그때마다 싹싹하게 인사하고 살갑게 다가가는 편이었어서 처가모임만 가면 늘 '이 집은 사위 정말 잘 얻었어'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지난 추석에도 아내의 작은외할아버지댁에까지 같이 다녀온 기억이 난다. 구차해 보여서 말로 할 수는 없었지만 늘 나는 아내도 나의 친조카에게, 가족들에게 그렇게 대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런저런 작은 서운함이 쌓여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나를 사랑해서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책임감으로 같이 사는 것이었으니.




봄에 부부상담을 받을 때였다. 막판쯤이었을까. 한 번은 상담사 선생님께서 아내에게 나를 사랑하는지 물으셨다. 아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기억 난다. 부부상담까지 갔을 정도로 갈등이 있었던 상황이니 아예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부부상담 막바지여서 그래도 관계가 많이 나아지고 있을 때였는데, 아내의 머뭇거리는 모습에 속으로 깜짝 놀랐던 생각이 난다. 아내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겨우 상담사 선생님께서 서로 만약 아프면 장기이식은 해 줄 거 아니냐고 물어보시며 상황을 수습하셨던 것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셨던. 그건 사랑이 아니다. 배우자에 대한 책임감이지.


아내는 나와의 결혼 초반 3년은 사랑으로 같이 살았고 이후 4년은 사랑은 없었지만 이미 결혼했다는 것 때문에 책임감으로 살았다. 책임감만으로 이어지는 결혼생활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느 정도 아내가 이혼에 대해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렸을 때 아내가 내게 했던 말이 바로 '먼저 이혼 이야길 꺼내어 주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아내는 책임감 때문에 불행을 감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와의 결혼생활을 이어 갔을지도 모른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도장을 찍기 전에 아내와 대화를 하던 도중, 아내가 봄에 부부상담을 받고 이혼하지 않으면서 '아, 나는 이제 honest와 이혼하지 못하는구나. 내 인생은 끝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물론 하루이틀 뒤에 본인이 말실수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내가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나 때문에 아내의 인생이 끝났다면 그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한편으로는 그때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줘야지 하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긴 하는데, 아내의 이야기가 너무 처연하고 체념적이어서 아내를 보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 번 다른 선배와 이야기하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다른 평범한 남자 같았다면 아내와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우리 관계의 최대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나의 예민함이었다. 그냥 평범한 남자 같았다면 아내에게 권태기가 왔어도 몰랐을 수도 있고, 아내와의 생활에서 부딪치며 겪는 작고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세상에서 그런 부분을 여성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그게 정반대였다. 아내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지 않게 예민하지 않고 오히려 둔감한 편에 속했다. 내가 아파도 이야기하기 전엔 전혀 몰랐고, 아마 내가 서운함을 느끼고, 감정이 쌓여 가고 있었던 것 또한 아내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반면 나는 아내의 작은 감정이나 변화 하나하나를 금세 캐치하고 느끼고 있었고, 그걸 아내에게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말도 하지 못하는데 겪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내가 평범한 남자들의 성향이었다면. 아니면 아내가 평범한 여자들의 성향이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우리는 정말 잘 맞았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둘 다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남녀라도 바뀌었다면 '오늘 나 뭐 달라진 것 없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이라도 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내가 머리를 자르고 와도, 아니 파마를 하고 와도 전혀 모르는 아내를 보면서 그저 서운해 할 뿐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했다. 그런 관심이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아내가 내린 결론이 맞다. 지금 나는 정말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 나갔다고 하더라도 괴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부부상담의 마지막날이었다. 아내와 같이 간 교회에서 아내에게 작게 말했는데 아내는 내게 짜증을 냈고 내가 무안해 하면서 미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헤어지고 나서 '네가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자기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화 내서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이혼으로 결정을 내리고 아내는 그 이야기를 했다. 만약 우리가 계속 같이 산다면 자기는 그렇게 나에게 늘 짜증 내고, 나는 늘 자기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 하면서 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어쩌면 그렇게 우리는 이혼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도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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