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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Jun 23. 2024

모든 일엔 선이 있다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29

지옥과도 같은 2박 3일이었다. 이게 3박 4일이 될지, 4박 5일이 될지, 29박 30일이 될지 나는 모른다. 그저 내일부터는 출근을 하고 다시 업무에 바쁠 예정이기 때문에 조금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복용량을 많이 줄였던 약은 투약량이 엄청 늘었다. 늘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뇌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심지어 어제부터 오늘까지 고향 부모님 댁에 다녀오면서 약을 넉넉히 챙긴다고 챙겼는데, 당연히 남을 줄 알았던 약이 오늘 점심엔 이미 다 떨어져 있었다. 서울 집에 도착하자마자 약부터 찾아 먹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아내에게 잘 들어 갔느냐고 연락했더니 의외로 금방 답장이 왔다. 이혼까지 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예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혼하고 나면 차라리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은 나에게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염려된다고. 원래부터 많은 생각과 끝없는 후회 속에 빠져 있었던 나지만 지난 2박 3일 동안에는 그동안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들마저 떠올라서 더 힘들었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내와 같이 제주도로 휴가를 떠났던 것도 기억이 났고, 신혼 초에 좋았던 시절도 계속 기억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하면서 매몰차게 굴었던 장면들이 떠올라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더 괴로웠다.


브런치에 계속 연재했지만 아내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우리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솔직히 남을 탓하는 것 같지만 내가 그 과정에서 이혼 결심을 가장 굳히게 되었던 건 아내가 지난해 봄에 나와의 부부상담을 끝내고 결혼생활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의 삶이 끝났다, 내 삶은 없구나 같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다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요 행복이었는데 아내의 그 이야기는 정말 충격이었다. 아내도 하루이틀 내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다며 실수했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한 번 귀에 들어온 말은 지워질 수가 없다. 그것이 내가 아내에게 내밀었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아내에게 아내의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아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알려 주고 보내 주고 싶었다.


우리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두세 시간씩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처음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아내가 도장을 찍기까지 한 달 동안 나름대로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았고,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아내도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망설이면서 내게 몇 차례 손을 내밀었었다. 그랬다. 이미 우리 관계는 그만큼 무너져 있었다.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가지고 상대를 붙잡을 만큼의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아내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최소한 거기까지는 가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아내가 도장을 찍은 순간 모든 것은 끝난 셈이었다. 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선을 넘어 버렸던 것이다.




왜 한 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왜 한 번이라도 망설이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후회하게 될 거란 걸 몰랐을까.


물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때 우리가 그냥 그 상태로 봉합해서 결혼생활을 이어 갔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 사람은 뭔가 깨지고 부서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법이니 결국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같은 냉정한 부부 사이를 이어 갔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행복했을 선택은 아니다.


비록 사람이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은 다 알 수 없는 법이지만 미리 한 번 지금과 같은 결과를 시뮬레이션해 볼 수는 없었을까.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느낄 외로움, 아내에 대한 그리움, 이런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아내와의 헤어짐은 둘만의 헤어짐이 아니라 가족과의 결별이라는 것을 새삼 되뇌어 볼 수는 없었을까.


후회란 결국 모든 일이 다 지나고 나서 하게 되는 법이지만, 정말 후회를 멈출 수가 없다. 이번엔 아름다웠던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모든 일엔 선이 있는데 왜 난 그 선을 지키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 지난 봄에 아내와 부부상담을 시작하면서 내가 아내에게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되었던 건 아내가 각 방을 쓰면서 자기 방문을 잠근 것에서 받았던 충격 때문이었다. 네가 그 정도로 나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뭐하러 같이 사느냐고. 그때는 그렇게 아내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지난 가을과 겨울엔 내가 선을 넘으면서 아내와의 관계를 이렇게 파탄으로 만들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봄에도 아내가 나를 붙잡아 주길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고.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어딜 떠나서도 계속 아내의 연락을 기다렸고. 그런데 아내는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착각했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착각하지 않았더라도 선은 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은 이렇게 항상 다 지난 뒤에야 배우고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천재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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