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16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by honest Jan 08. 2025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혼자 다니는 나는 늘상 심각하고 울적한 표정에 어깨를 한껏 쪼그리고 다녔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하나 있었다. 나를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항상 웃고, 밝고 명랑한 선배 또는 친구 혹은 후배라고 생각했던 점이다. 나는 거의 항상 심각하게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다녔기 때문에 이 점이 너무 의문이었다. 한 번은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때 당시 친했던 후배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오빠가 혼자 다닐 때는 어떤 표정으로 다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아는 사람을 보면 오빠는 얼굴이 돌아가면서부터 바로 밝게 웃으며 반가워하는 얼굴로 바뀌어요. 그러니 당연히 웃는 인상으로 볼 수밖에 없죠. 모르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표정이 바뀌니깐.' 아아. 이보다 더한 명쾌한 대답이 있으랴. 후배의 말 그대로였다.


나는 아는 사람이 많아서 친구들이 삼보일배를 본따서 나는 단과대학 건물 앞을 걸으면 삼보에 한 명씩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혼자 있을 땐 최대한 심각하고 우울한 표정 속에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단과대학 건물 앞을 걷는 동안 나는 우울한 표정을 지을 새가 없었다. 삼보에 한 명씩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밝게 웃으며 그들과 근황을 묻고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향해야 했고, 그런 뒤에 또 삼보를 걸으면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단과대학 앞을 걷는 몇십 미터 내내 나와 함께 걷는 지인들은 나의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을 볼 새가 없었다. 후배의 말이 정확했다. 특히 나는 고도의 인지장애가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사람을 훨씬 잘 알아본다. 지금도 그래서 종이신문에 작게 증명사진 한 장 실린 사람의 얼굴마저 기억할 정도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내가 '너 왜 이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있어' 하고 말을 걸기 전에 내가 상대를 알아보는 건 당연하지. 도리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내가 아는 체함으로써 깜짝 놀라는 경우가 흔했다.




나는 나의 아이덴티티 가운데 우울함과 부정성, 심각성, 진지함 등을 늘 생각해 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아마도 그냥 조금 비판적이고 진지한 사람이지만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사람까지는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은데 아내와 함께 살면서, 그리고 아내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워낙 대책 없이 밝고 긍정적이었던 아내로부터 부정적이고 우울하다는 투의 지적을 많이 받으면서 더더욱 그것을 내 아이덴티티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특히 그 점이 결국 우리 결혼생활을 파국으로 몰았다는 점에서, 내 마음은 더 좋지 않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가진 특성에 대해서, 안 그래도 부정적인 데 더해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었나 싶다.


그런데 지난 여름 광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예전에 모셨던 부장님과 함께 저녁을 먹고 근처 바로 이동해서 술을 한 잔 곁들이는데, 아무래도 당시에는 내가 가장 힘들 때였던 만큼 아내와의 가정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장님께서는 그 전 봄에 헤어질 때도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문자를 보내주셨던 터라 더 편하게 말을 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아내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부장님께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를 15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내가 부정적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냥 조금 사회에 비판적인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했고, 그건 부정적인 것과는 아예 다른 거라고. 얼마 전에 병원에 갔을 때는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의외의 긍정성과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계시는 데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부정적이고 우울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 삶에 대해서는 상당한 안도감과 또 대책없는 낙관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래서 나는 '내 삶에는 절대 극단적인 경우는 생기지 않을 거야'라는 근거없는 신뢰가 있다. 심지어 가정이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모(母)회사에 계신 분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서 차 한 잔을 함께 마셨다. 그런데 그분도 의외의 말씀을 한마디 건네셨다. 자신이 알던 나는 부정적이기도 하고, 비판적이기도 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다시 그 유쾌함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사실 무척 놀랐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한때 무척 유쾌하고 명랑하고 밝은 사람이었다는 걸. 오랜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나를 그런 사람으로 떠올린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그런 유쾌함을 잃은 건 상당히 오래된 일이라고 보았다. 서른을 넘으면서, 대략 한 10년도 더 오래전의 아주 오랜 옛일? 하지만 그분께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래도 곳곳에 유쾌함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5년 전이면 내 생각 속의 나는 이미 상당히 부정적이고,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인데.


지난해에 새로 성당의 청년성가대에 들어가면서 청년부의 사람들을 십수 명 새로 알게 되었다. 서른다섯이 넘은 이후로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게 된 일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꼰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에게 함부로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기가 어렵기도 하며, 아직 그만큼 가까워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로부터 듣는 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쾌하고, 많이 웃으며, 밝고 명랑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대학 때 같지 않아서 나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바로 반가워서 웃으며 얼굴의 표정이 바뀔 정도의 인물은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에서 만난 아이들의 나에 대한 이미지는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이미지와는 180도 달라서 무척 밝고 유쾌한 편이다.


나는 이것을 내내 아직 청년들이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나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실망하고 나를 떠나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의, 젊었을 때만큼의 유쾌함을 지닐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대학 때 내가 썼던 글 가운데 사람이 평생 2년이나 화를 내는데 웃는 데 드는 시간을 모두 더해도 80~90일 사이라는 연구결과를 보고 놀라서 썼던 글이 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없었던 반면, 하루에도 정말 수백 번 웃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과연 그 연구결과가 정확한지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화를 낼 일이 훨씬 많아지고 웃을 일은 훨씬 줄어든다. 조카를 보고 있노라면 뭐가 저렇게 재미있는지 웃음 짓게 되면서도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아이들은 항상 즐겁다. 뭐든 새롭고, 뭐든 신기할테니깐.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반가울 것이고. 좌우지간 그래서 나도 당연히 예전만큼 유쾌한 사람이 아닐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나의 삶에 대한 믿음과 긍정성도 많이 무너졌고.


그런데 나는 다른 한편으로 내 정체성을, 내 삶을 너무 부정적인 단어로만 쉽게 정리해 버렸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유쾌하고 밝다고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나는 굳이 '그건 너가 나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래'라고 하면서 살아왔다. 나 스스로 나의 부정성에 대해 너무 깊이 정의 내려버린 탓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나는 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부정성, 우울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의 내렸을까.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부러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식적으로 유쾌하고 밝은 면을 보이려 애쓰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또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가서 정정해 주고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본 나에 대한 시선과 나의 성격, 나의 아이덴티티는 또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도 한 것일 거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굳이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매우 부정적인 사람입니다'라는 불필요한 설명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 사람들도 알 것이다. 아니,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어떻게 늘 웃는 사람만 있을 수 있으며, 반면 또 늘 우는 사람만 있을 수 있을 것인가. 혹여 내가 어느 날 그들 앞에서 울적하고 힘든 모습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또한 내가 가진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텐데 나는 왜 늘상 그걸 그렇게 미리 앞서서 설명하려고 애썼는지 모르겠다.


거창하게 유쾌함을 회복하고 예전의 밝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그럴 수도 없을 것이고. 그냥 그저 그렇게 남들에게 실제로 보이는 대로 살자. 내가 억지로 내 모습을 꾸며내고 있는 것은 아니니. 나는 유쾌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지만, 부정적이고 우울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부정적이고 우울하기만 할 수도 없다. 내가 먼저 나서서 나를 울타리에 가두어 두는 삶은 올해에는 그만두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저는 인정욕구가 강한 게 아니고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