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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27. 2020

그럼에도 믿는 일

내 글로 영화를 만들며

몇 해 전부터 지인들에게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다녔다. 뻔스럽게 만들지는 않고 자꾸 말만 앞서니 그에 지친 한 후배는 지당한 화를 내기도 했다.

-언니, 나도 맘에 안 드는 구석이 계속 생기고, 어렵지만, 그래도 만드는 거야. 말만 하지 말고 만들어.

얼굴이 붉어지고 뭔가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직접 영화를 만들기까지는 그 대화 후에도 한참이나 걸렸으니 어쩌면 항변을 삼킨 게 그나마 덜 자존심 구기는 일이었지 싶다.


그 후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직접 쓰고 만드는 일이 어려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학시절, 영화를 만들어볼 수 있는 수업이 있었다. 처음 무언가를 창작하고 만든다는 설렘이 있었고, 내 안에 무언가 대단한 게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비약이 있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찍는 과정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고쳐봐도 내가 봐왔던 매력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투박한 느낌이 다듬어지지 않았고, 배우들의 연기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말문이 막혔고, 나를 도와주는 이들이 웃으며 화기애애할 때 나는 시간이며, 돈이며 걱정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그 웃음소리조차 미울 때가 있었다. 고난의 클라이맥스로, 모든 촬영본이 들어있는 유에스비를 떨어뜨려 컴퓨터에서 텅 빈 폴더를 확인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울며불며 용산상가를 뛰어다녔지만 끝끝내 복구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자포자기했건만, 아량 넓은 배우들이 흔쾌히 재촬영에 힘을 실었고, 이런 우연 같은 고난이 혹시나 더 좋은 영화를 탄생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초심자의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첫 영화가 상영되던 날- 의도치 않은 장면에서 모두가 박장대소하고, 선생님은 언뜻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잔인하게 내 영화의 문제점들을 쏟아내셨다. 편집할 때는 분명 꽤 괜찮아 보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유치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잠시나마 기대하고, 재밌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무색해지고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아- 나는 이런 일에는 소질이 없구나, 이 비참함을 기억해야지.


연출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수업 중에 만드는 습작 같은 영화였다 할지라도, 내 마음과, 내 살아온 일부를 담았을 텐데- 보는 이의 솔직한 조소나, 그것을 만든 나 스스로의 거절은 아무래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선 긋고 쿨해질 수 없는 어떤 감정적인 상처를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왜- 다시 만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만 움직이다 보니 스스로가 이야기의 주체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선택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좌절하는 마음이 쌓이다 보니, 직접 나를 찍어 뭔가를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이런 마음들이 합하여져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은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수치스러웠던 기억 사이로 슬쩍 올라와 있었다.


걷다가, 지하철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용기를 내 적어보다가도 그때 그 상영회에서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내 첫 번 째 영화에게서 받았던 배신의 감정이 본능처럼 그만 하게 했다. 어쩌면 그건 나를 담은 이야기가 내가 만듦으로써 볼품없어지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였을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뒤로하고 비로소 직접 쓰고 촬영할 수 있었던 건, 기한 내에 만들어서 제출해야만 하는 일이 우연스레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실망스러운 무언가가 나오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 까지 포기해왔던 시간들, 또 내가 지금까지 삼킨 이야기들이 쌓일 대로 쌓여서 터져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나도 너처럼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자꾸만 생기고, 어려웠지만, 드디어 내 영화를 찍어봤다고 후배에게 얘기하진 못했지만, 촬영을 마치고 나니 어쨌든 대학시절 상영회에서 느낀 소질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찍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찍은 낙인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좋았다. 도피를 멈췄다는 뜻이니까-


용산상가를 뛰어다녔던 그 아찔함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껏 예민해져서 같이 만드는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독단적인 생각들이 스스로를 외롭게 하기도 했다. 후에 나를 포함해 완성된 영화를 볼 사람들이 별로라고 생각될 부분들을 남김없이 볼품 있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나를 지치게만 하니, 결국엔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게 되더라도 내게서 튀어나온 이 이야기를 믿어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하여 아- 연기를 하건, 영화를 찍건 우리는 모두 믿는 일을 하는 거군요.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하고, 같이 만드는 저 사람을 믿어야 하고, 이 작업이 어떻게든 흘러가게 될 것을 믿어야 하고, 종국에는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닿을 것을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군요. 하고 이 일을 하고 있는 이름 모를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완성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가, 적은 글 속에서 꽤 마음에 드는 장면들에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욕심으로 바뀌고, 그러다 결과물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앞선 불안과 불신으로 불똥이 튀었다. 이런 얘기를 또 다른 동생과 나누는데 (어떻게 내 주위의 후배나 동생들은 대체로 나보다 현명한지)

-언니, 처음 찍는 거면 욕심부리면 안 돼. 그 욕심 다 보여 영화에. 그냥 해 그냥.


내 생각에 이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화를 찍는 과정이 내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재밌었던 기억으로 남은 건 동생의 말에, 욕심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 후에 만들 수도 있는 또 다른 영화와, 내가 할 연기에도 이 동생의 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니, 또 욕심부리네. 그러다 망해. 그냥 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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