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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나무 Aug 07. 2021

8개월간의 촬영과 내게 남은 것

진을 빼놓는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미처 탈수하지 못한 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처럼 끊임없이 늘어지는 것이 이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장장 8개월간의 촬영 동안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쓴 탓인지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더운 여름이다.


8개월 간의 촬영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나는 그토록 오래 촬영을 해 본 경험이 없었고, 그토록 많은 또래 배우들과 함께 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고, 아주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또 그만큼이나 사소한 이유로 내 마음을 전부 줘버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힘을 다해 나를 숨기기도 했고, 또 힘을 다해 발가벗어 버리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과,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감각이 뒤엉켰고 그 모든 감정들이 어디로 치닫던 어쨌든 촬영에는 끝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게 꿈이었던 것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퇴근 버스에 올라타면 상을 주듯 얼른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는 스스로의 유약함에 치를 떨거나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넘어선 자의 으스댐을 음흉하게 숨기기도 했다.

또, 무력하다 느낄 때 손 내민 누군가의 표정이 있었고 말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말, 그 표정을 두고두고 생각한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을 일으켜 주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선의. 그 마음을 받고 일어선 내가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다시 나눌 수 있었던 그 마음들을. 그런가 하면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는 요동치는 순간 또한 있었다. 어찌 되었든 계절은 힘차게 바뀌고 나는 그들 앞에서 점점 힘을 풀고 그들의 눈을 보며, 표정을 보며 연기하는 것에 큰 행복을 느꼈다.


촬영하며 줄곧 상상하곤 했다. 힘든 순간이면 더더욱. 촬영이 끝나고 나의 치기, 나의 나약함, 나의 용기 없음을 이긴 대가들을. 보상들을. 터져 나오는 떳떳함, 무언가를 넘어서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무도 훔칠 수 없는 여유 있는 눈빛을. 허나 마치 성대한 파티가 끝나고 치울 것들로 진창이 되어버린 연회장처럼 그 순간들은 폐허가 되어 사라졌고, 나는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처럼 좀체 일어나지를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무기력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뭐라도 해보려고 움직여봤지만 그럴수록 마음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그러다 문득 구직 사이트를 보고 있는 나를 멀리서 바라봤다.  

고작 그 거였냐며, 나를 무력하게 만든 것이 고작 너였냐며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일이 없을 때의 삶이 얼마나 사람을 말라가게 하는지를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먹고사는 일은 우리에게 늘 급한 일이라 해도 하나의 산을 넘느라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숨이 가쁜데 곧장 또 다른 시작점에 서서 오를 산을 올려다보는 일은 심히 가혹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기억해낸다.

8개월의 촬영, 그 처음을. 첫 촬영이 시작되기 전 날을.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애써 괜찮은 척을 해보다가 갑자기 엉엉 울어댄 한 낮을. 새로운 시작이 내게 주는 부정적인 자극들이 몸을 일으켜 나를 장악했다. 나는 두려워 한참을 떨어댔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시작점에서는 떨어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바이다. 그리고 그 떨어대던 시작점을 뒤로하고 촬영이 끝날 즈음에는 삼삼오오 모여 롤링페이퍼를 나눠 쓸 만큼 아름다웠던 하나의 끝을 자축하며,

숨을 고르기로 하고, 다음 주에는 고대하던 바다에 간다.


세트장에서 봤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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