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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나무 Mar 05. 2024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

지난해를 곱씹다 보면 그 해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작년은 예년과 다르게 모르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던 해였다. 연기를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했던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오래도록 수업 일로 생활을 해왔던 내가 아주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한 해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연기 이외의 일로도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 오랫동안 해 온 연기가 많은 순간 기쁨을 주기도 했지만 언제 내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쉬지 않고 따라왔으므로. 아르바이트를 구해볼 쯤은 아마 그 기쁨과 불안감의 비율이 불안감의 승리로 전복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30대는 알바로 잘 뽑지 않는다는 말에 꽤 여러 군데 지원서를 넣었는데 오래 연락이 오지 않아서 마음을 접을 즈음 지원한 곳들 중에서 여기가 되면 참 좋겠다 싶었던 집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고 붙었다는 연락을 받으니 더럭 겁이 났다. 스스로 지원해 놓고는 연기와 멀어지는 느낌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첫 출근 전날 밤은 거의 날 밤을 지새우도록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존심 상하는 긴장감이었다. 이 나이 먹고 아르바이트 전날 밤에 긴장돼서 밤을 새우다니. 첫날 사장님께 하나하나 배우는데 실수라도 할까 봐, 내 나이대의 알바를 뽑은 걸 후회하실까 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얼른 잘 해내려 할수록 손에 힘이 들어가서 쉬운 일도 실수를 하고, 목에도 힘이 들어가서 창피하게도 연신 큰 소리로 네! 네! 거렸다. 사장님은 그런 내 모습이 (당연히) 어설퍼보였던 것인지, 사장님의 선택이 후회스러웠던 것인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렇게 긴장 안 하셔도 돼요’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는 그 말이 묘하게 자존심 상했고, 긴장을 안 할 수 있었다면 진즉 안 했을 거예요 라는 말만 속으로 되풀이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한 대답조차 큰 소리로 “네네!” 했다. 스스로의 사회초년생 같은 모습이 무능하게 느껴져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맞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의 무능을 체감하는 일. 그러나 무능을 체감하는 시간을 거치지 않고 무언가가 느는 법도 없다. 시간은 가고, 고맙게도 시간은 그냥 가지 않고 느린 나에게도 무언가를 가르쳐주어서, 제법 손이 빨라진 어느 날, 카페 앞의 도서관에 출근할 일이 생겼다.


내가 일하는 작은 카페 앞에는 도서관이 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가장 좋은 점이자 유일하게 좋은 점은 도서관이 가깝다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연기 수업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연락을 취했던 도서관에서 답이 왔다. 도서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연기수업과 결합한 오디오북 수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도서관 수업의 학생들은 연령대가 여럿이었지만 거의주부 분들이었다. 출석부에 한 명 한 명의 출생연도가 적혀 있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은 한 두 명밖에 없었고, 가장 연장자분이 우리 엄마보다 대여섯 살이 많았다. 그분들의 눈에 본인보다 어린 선생님이 어떻게 보일까?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뜸 무시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수업을 준비할 때부터 긴장이 됐다. 첫 수업에서는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지만 점점 인생선배님 앞에서는 그런 노력도 허사구나 싶었고 좀 어설프면 어떠랴, 긴장했다는 것도 들키면 어떠랴 차라리 그 마음마저 활짝 열고 다가가자는 마음이 들며 편안해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마음이 내 속에서 자연히 올라왔을 리는 없고 그분들이 먼저 마음을 열어주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운 사람에 대한 정서를 떠올리기 위해 그 사람과의 한 장면을 8절 도화지에 그려보기로 한 활동이 기억난다. 어느 한 분도 허투루 하지 않고 신중히 색을 바꾸며 그렸다. 이제 발표를 해보자고 하면 연신 “시간 좀 만 더 주세요 선생님!” 하는 외침이 들린다.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는 외침은 늘 선생을 기쁘게 만든다. 내가 제시한 활동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그보다 더 잘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열심히 그린 그림을 들고 한 명씩 나와 발표를 했다. 지금은 연락할 수 없으나 고마운 선생님을 얘기한 분과 발표하며 눈물을 글썽이셨던 분이 기억나고, 또 무슨 맥락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7살 때의 엄마가 그리워요”라고 얘기했던 그 한마디가 기억난다.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 한 문장은 내가 30대, 우리 엄마가 60대로 들어서며 엄마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강하게 들었던 정서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그분은 웃으면서 얘기했고 나는 마음으로 글썽였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도 그리운 우리 엄마, 30대의 엄마- 주름 살 없이 피부가 팽팽하고 젊고 나보다 커다랗던 엄마를 떠올렸다.


 3개월의 수업 동안, 무언가를 배우며 살려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음이 좋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한 명 한 명의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내가 볼 수 없는, 그분들의 일상을 상상하며 수업 시간이 더욱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로 채워지길 바랐다. 그래서 감히 그분들 마음에 들여다보지 못해 굳어있던 부분들이 수업시간에나마 말랑말랑해지길 바랐다.

 3개월의 수업이 끝나는 날. 앞에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어려웠던 시기를… 이 수업을 하며..” 하는데, 제일 나이가 많은 수강생이셨던 분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눈물이 창피해서 연신 닦아 내는데 그분의 눈에 안쓰러움과 위로가 담겨 있어 더 멈출 수가 없었다. 3개월의 시간 동안 수업을 받은 것은 그분들인가 나인가.


저번 주는 반년 가까이했던 카페 아르바이트의 마지막 날이었다. 간간이 비가 내렸다. 손님이 없을 때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30대의 중턱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자존심 상했던 불손한 시작점을 지나, 여기에 앉아, 도서관과 나무들을 보며 책을 읽는 순간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결승선에 올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었다. 그녀의 글은 자연을 닮았다. 글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려는 사심이 느껴지지 않았고, 조악하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경이롭게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지는 글들이었다. 글에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 선생님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인가, 나는 시작점과 결승선을 몇 번을 돌고 돌아야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아득한 마음에 연신 책을 덮고 창 밖을 바라봤다. 긴장한 첫날이 떠올랐고, 책을 읽다가 창 밖의 나무를 보는 이 기쁨이 왠지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았다.

 연기를 하길 원했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는 문외한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을 이해하는 일에 이렇게 서투를 수가 없었다. 카페와 도서관 이 두 가지의 일,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이 한 마디, 하나의 표정으로 내게 남아 나는 연기를 할 때보다도 더욱 사람들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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