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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31. 2023

나는과 너는

나에게서 시선을 뗄 자유

 글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글이 좋은 글이다, 또는 이런 글은 좋지 않다에 대한 기준이 특별히 없는 편이다. 글쓰기에 관한 관심은 크지만 글을 애써 배우지 않는 이유도 이런 기준 없음이 좋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너무 오랜 배운 탓에 (본인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이 연기는 이러이러해서 아쉽고, 저 연기는 저러저러한 단점이 보이고…. 이런 나의 판단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글쓰기에 관해 유일하게 기억하는 말이 하나 있다. 아마도 중학생 때였던 거 같은데 한 선생님이 일기에 관해서였나 아니면 포괄적인 글쓰기에 해당하는 말이었나 기억은 안 나는데, 어쨌든 글에 ‘나는’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 말라고 하셨던 이야기다. 글을 읽는 사람은 화자가 ‘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나는’을 붙여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성적과 무관하게)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때부터 글을 쓰다가 ‘나는’이라는 활자를 적을 때면 흠칫 의식하게 됐다.


 저번에 쓴 글을 다 쓰고 올리고 나서 다시 읽어볼 때 왠지 모를 매스꺼움을 느꼈다. 글에 ‘나는’이 유난히 많이 박혀 있는 것 같았고, 왠지 스스로에게 매몰된 화자가 적은 글 같아서였다. 그러므로 내 시선이 ‘나’에게만 머무르고 있어 ‘너’에게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글에도, 내 삶에서도.


 그래서 사실 너에 대해, 타자로 시선을 옮기는 글을 쓰고 싶어서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가, 하필 비슷한 주제와 맥락을 다루고 있지만, 훨씬 수려하고 솔직하고 본질이 살아있게 쓴 글을, 또 하필 다 적은 날 읽게 됐기 때문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 글을 읽고 나니, 타자에 대해 썼다고 생각한 글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글 같이 읽혀서 다시 한번 속이 울렁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 지점 때문에 시선이 오롯이 남을 향하지 못하고, 남이 보는 나에 대해 더 많이 바라보고, 생각한다.


 최근 촬영 중에 있었던 일이다. 계획한 연기가 있었는데, 현장에서 연출이 내 해석과 다른, 우리가 그전에 나누지 않았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연출의 해석을 더 깊이 있게 들을 수 있게 된 건 좋았지만, 그전에 나눈 이야기들을 토대로 준비한 연기를 바로 바꿔야 했기에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해석 또한 공감이 됐고, 그 방향대로 연기했다. 현장에서 그 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연출의 말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짧은 시간 최선을 다했다. 분주한 현장에서 혼자 노이즈캔슬링을 한 것처럼 고요히 온갖 상상을 끌어오고 또 생각하고. 그 장면의 촬영을 마치고 모니터 하지는 못했지만, 연기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추후에 그 연기를 스크린에서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장면의 연기가 가장 어색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연출의 의견에 공감을 했고, 마음이 동했고 순간적으로 집중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연출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마음이 동하지 않았으나 최대한 애쓰고 싶었다는 것을. 그 순간의 나는 연출의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내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현장에서 내가 연기를 잘 해내지 못하면 내 존재 자체가 수용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 두려움이 내 상태에 대해 솔직히 자각하고 대화 나눌 기회를 앗아갔다. 남을 의식… 남에게 잘 보이려… 내 생각은 스스로 폐기하고… 나에 대해 절대 스스로 믿어주지 않고…..


  내 시선이 내게만 머무는 이유에 대해, 남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알던 것이 촬영장의 일을 통해 꽤 명확하게 자각됐다. 남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하면 말을 고르게 되고, 고르느라 내 진짜 마음은 놓치게 되고,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반응에 너무 민감해진다. 내가 너무 분주한데 남에게 시선이 맺힐 리 없다. 내가 너무 힘들 때는 남의 힘듦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멈추려고 노력해 본 것들이 있다.  타인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눈치를 본다거나,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한다거나, 과한 리액션을 하는 것. 그 또한 내 의지대로만 되진 않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친구와 전철을 타고 가면서 한 방송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그걸 보면서 나 자신이 참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어

라고 얘기했고 그 친구가

-맞아

라고 했다. 순간 나는 그 ‘맞아’의 의미가 본인도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의 맞아 인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평소의 나였다면 민망하고 정신이 없어져서 그냥 넘어갔겠지만 다시 한번 반문했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아니! 나도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다고.

 반문함으로써 그 한 마디의 오해가 풀린 쾌감은 꽤 컸다. 그 친구와의 시간이 내내 편안했으니까. 어쩌면 그녀에게 내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 날일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아빠와 다투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고 운 흔적을 세수로 지우고 나왔는데 엄마가 “왜 그거 갖고 울어~”라고 얘기해 깜짝 놀랐다. 난 분명히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일순 애써 감정을 누르느라 굳은 얼굴이 풀리며 차라리 수치를 드러냈다. 눈시울을 붉히며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아니~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뭐라고 하잖아”


 나는 내가 나를 꽤 잘 포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엔 타인들이 그 포장 속 내가 모르는 나까지 꽤 뚫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내 연기를 볼 수 있는데 나만 못 보는 것처럼.

 또한 내가 고르고 고른 말들을 내밀고도 사랑받지 못하면 일순 상대를 미워하는 얕은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는 고르고 고른 말이 아니라 투명하게 내미는 마음이 내가 보일 수 있는 사랑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건 다칠 용기를 갖고, 수치를 입을 용기를 갖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거니까.


 아빠와 다툰 다음 날, 아빠의 사과문자를 받았다. 아빠가 나에게 사과를 건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겸연쩍게 밥은 드셨냐고 묻는 게 전부였다. 그 문자를 읽고 바로 울고 말았다. 그 눈물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그저 추측할 수 있는 건, 내 안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차 솔직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이 있었고 그 문자가 그 절망감을 한 꺼풀 벗겨줬다는 것이다.


 최근에 댄스 수업에서 춤을 추는데 웨이브 구간에서 선생님이 “규리 씨~ 음악 들으면서 그냥 춤을 추면 되는데 너무 본인모습을 확인하려고 하니까 웨이브 때 고개가 옆으로 안 가고 거울만 보고 있어요”. 했다. 내 모습을 너무 거울로 확인하려 드니까 더 뻣뻣해진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나는 연기도 내 삶도 그렇게 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고개를 돌려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춤을 췄을 때 선생님이 훨씬 낫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올 가을 나는 당신들을 만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당신들에게 좀 더 솔직해질 것이다. 당신에게 잘 보이려 내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내게서 시선을 떼 당신을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나는’ 보다 ‘너는’ 이 더 많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글에도 내 삶에도.




커버사진은 미야케쇼 감독님의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스틸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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