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오랜 기간 연기하는 게 무섭고, 촬영장에 나가기 전날 밤이면 두려움에 휩싸였다. 잠을 제대로 자고 나간 적이 별로 없으니 나가서도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면 연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루의 기분이 그 생각으로 좌우되기도 했었다.
요즘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뒤늦게 정주행하고 있다. 스토브리그는 야구에 관한 드라마인데, 야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나 같은 사람도 단숨에 마지막 회까지 보게 하는 참 잘 만든 드라마다. 스토브리그 13회에서는 유민호라는 신인 선수가 입스를 겪으며 위기에 봉착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입스는 생소한 단어인데 사전적인 의미는 ‘부상 및 샷 실패에 대한 불안감, 주위 시선에 대한 지나친 의식 등이 원인이 되어 손 · 손목 근육의 가벼운 경련, 발한 등의 신체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로 나와있다. 내게는 ‘슬럼프’라는 단어가 더 친숙한데 완전히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유민호는 입스를 겪으며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고, 팀 내의 어떤 조언에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상대 팀인 바이킹스와의 연습경기에서 다른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감독은 입스에 빠져 있는 유민호를 출전시켰고, 유민호는 경기에서 계속 볼넷을 맞는다. 심리적 압박에 의해서 볼을 자신감 있게 던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코치는 다가와서 말한다. 볼을 잘 던져서 삼진으로 잡거나(아주 잘하거나) 아니면 홈런을 맞으라고.(완전히 패배하라고)
이에 유민호가 던지는 볼은 계속해서 상대팀의 홈런을 맞고 팀은 그로 인해 지고 말았지만, 유민호의 팀 드림즈는 모두가 기뻐한다.
그들의 대화는 이렇다.
-유민호 선수 이제 입스 다 극복한 거죠?
-(상대팀 대사) 저렇게 얻어맞았는데 극복이란 단어가 어떻게 나와요?
-이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으니까 안타를 얻어맞는 거죠.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어야 삼진도 잡을 수 있는 거고요. 정면 승부를 못해서 던진 볼 넷 보다는 우리 선수들이 막을 수 있으니까 스트라이크를 던져서 안타를 맞는 게 나요. 유민호 선수도 이제 한 스텝 밟은 겁니다.
나는 늘 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창피당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받고 싶었고 나를 캐스팅한 사람들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안간힘이 나를 입스에 빠지게 했다.
왜냐면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 아무것도 시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
작년 연말은 코로나로 인해, 한 해가 또 지나간다는 고무된 기분과 설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작년을 한 해로 쳐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 살 더 먹는 게 억울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새해 목표로 전화위복을 꿈꿔 본다. 1월 1일, 처음 다이어리를 펼치면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포부 있게 다이어리 맨 첫 장에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손에 쥐고 싶은 순간들- 가령 씨네 21에 인터뷰가 실리고 싶다, 이러이러한 작품에 캐스팅이 된다 라는 소망들은 접어두고 나의 새해의 목표를 홈런을 치던 안타를 얻어맞던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것으로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