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 초 나와 함께 했던 불안감이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늘 바쁜 쪽을 선택해 왔을 것이다. 작년에는 단편영화 한 편을 연출했다. 숨 가쁘게 바빴지만 잠시 멈춰있는 시간에 나를 바라보면 너무나 많은 일들을 감당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정작 진짜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미뤄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못 본 척- 이대로 영화를 완성하고 바삐 지내는 나날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고 믿었다.
영화촬영을 준비하며 바삐 지내는 동안, 자려고 누우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근육통에 온 몸이 아파서, 오랜 시간 뒤척여야 했다. 바쁜 일들이 끝나고 그 근육통은 멎었지만 허탈함과 모든 힘을 소진한 감각으로 기진맥진했다. 가만히 있는 것이 괴로웠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어떤 일들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고, 내 안에 살아 숨 쉬던 것들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던 걷는 일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디션 하나하나에, 짧게 나오는 역할 하나하나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고 긴장되고 초조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다시 희망을 품고 오래 기도하고 현장에 나가던 스스로의 마음이 생경해졌다. 그리고 그 생경함이 두려웠다. 연기를 잃으면, 내 삶에서 그것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지 아득했다. 그러고는 시시하고 탁한 얼굴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하루하루는 계속되었고, 그 생경함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연기를 하느라, 영화를 만드느라 하지 않았던 일들을 찾아봤다. 뭐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놓친 무수한 것들 속에 나의 잃어버린 마음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내가 몰두하던 방식이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되려면, 내가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로 더 잘 살아가려면 어떡해야 할지 사람들에게, 다른 일에게, 내가 피해 왔던 것들에게, 보잘것없어 보이던 것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망가진 몸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숨이 가빠지는 감각이 반가웠고 오랜만에 느끼는 몸의 고통이 기뻤다. 재료 하나하나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손질해서, 천천히 먹었다.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것, 어쩌면 내가 업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다른 일이 무엇이 있을까 기웃거렸고, 오해와 이기심으로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에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두근거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얼른 만나서 어떤 얘기든 털어놓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전에 서운하게 했던 것을 사과하고 싶기도 했고, 지금의 내 삶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 트라우마였던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춤을 추면 웃음거리가 되기 일 수였던 나에게 춤은 오랜 꿈이자 수치였다. 첫 수업 시간에 역시나 나는 춤추는 내 몸을 누군가 바라보는 게 싫었다. 나는 나를 바라봤던 타자가 되어 흉측하고 괴상한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모른 척 계속 몸을 움직였다. 가끔 거울 속 내가 꽤 멋있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작년에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내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품고 집에 오면 절망감을 숨기는 유일한 방식, 다른 식의 짜증, 다른 식의 분을 토했던 시간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는 분을 내고 후회하고 다시 분을 내고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때의 나는 나의 분노에 엄마가 닳아 없어질까봐 애가 탔지만 글을 쓰는 일도, 엄마에게 화를 내는 일도 멈추지 못했다. 그 전의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의 사랑에 대해, 수치에 대해. 여전히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점차 그 전의 뾰족한 감정과 말들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형태의 일상들, 내가 관심 밖의 것들을 내 삶 가까이에 두는 하루하루들을 보내며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더 제대로 알아갈 수 있었다. 때로는 이러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삶에 가장 큰 과제라는 것을 안다. 다시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풍경을 찾아다녔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느린 음악을 들으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을 메모장에 적었다. 카페에서 나와 흐르는 물과, 놀이터에서 여름밤을 즐기는 아이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어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부쩍 어릴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전의 나, 쉽게 위축되고- 그러나 순진무구하게 바라보고, 작은 친절에 하루 종일 기뻐했던 나를. 책 읽는 것이 도피가 되었던 날들. 나는 읽고 또 읽었었다. 읽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성장하고 있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점점 책과 멀어졌고, 좋은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껏 난장을 치고 멈춰선 나는, 이제는 우월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마음을 꽉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일어나서 확인한다. 그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았는지. 우월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훨씬 훠어-얼씬 더 자라야 한다.
가장 최근에 갔던 촬영현장이 공교롭게도 졸업한 예술고등학교 바로 옆의 학교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그때의 나이로 돌아가서 등교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촬영장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시간이 주어져서 학교 인근을 걸었다. 내 삶에 가장 큰 기대를 품었던 순간과 모든 것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순간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마음은 다시 요동칠 것 같기도, 뭔가를 영영 잃은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원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다, 다시 뭔가를 일으키다가 다시 잠자코 방치한다. 잘 기다려본다. 작년 내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내 방 바로 앞의 산과, 엇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색으로 빛나는 나무들과 창으로 해사하게 쏟아지는 빛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