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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Jun 06. 2022

쓸데없는 짓을 할 자유

무용한 시간의 소중함

요즘 중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수업의 마무리로 각자 좋아하는 것 한 가지씩을 얘기하고 마치자고 제안했다. 그 아이들의 답이 궁금하기도 했고,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저번 주에 나는 '고등학생일 때 가끔 일찍 학교가 마쳐서 아직 날이 밝을 때 집으로 올 수 있었던 날’을 좋아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그런 날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떠서 버스 타기 전에 괜히 편의점에 들러서 로투스를 사 먹거나 근처에 있던 크리스피도넛을 먹고는 버스에 탔다. 사람이 별로 없는 대낮의 버스 안에서 깊이 잠에 들었다가 내려도 한 낮인 게 신이 났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맘껏 보며 누워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 다음주에 새로 온 학생이 ‘모든 일과를 마치고 누워있는 시간’이 좋다고 말했고, 나는 나와 비슷한 답변에,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것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우리 모두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어쩌면 누군가는 무용한 시간이라고 생각할 그런 순간들 덕분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것 아닐까. 부여잡는 시간보다 가만히 있는 시간,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시간보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시간.


초등학생 때였나, 만화책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린 적이 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너무 잘 그렸다고 생각한 나는 아빠에게 달려가 수줍게 그림을 건넸다. 아빠는 화를 내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화를 냈던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두고두고 그때의 아빠를 미워했지만, 요즘 나는 그때 아빠가 지었던 표정을 자주 짓는다.


나는 내가 언제 뾰족해지는 지를 알고 있다. 해내고 싶으나, 해낼 기력은 없을 때.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쓰느라 모든 체력을 거기에 쏟아부었을 때. 그래서 부드러워지는 데, 화를 참는데, 끈기 있게 설명하는데 쓸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랬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된다. 화를 잘 내고, 기를 죽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처럼 굴고, 쉽게 윽박을 지르는 사람. 할 일의 노예가 되어, 거울을 보면 얼굴이 거무죽죽하고, 생기가 없고 눈이 죽어 있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 안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치스러웠고, 성취 없이 숨만 차올랐다. 마음이 말랑말랑 하지 않을 때는 뭘 해도 도루묵이니까.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게 된다. 쉽게, 둥글게, 기쁘게 했던 일들도 너무나 복잡하게 느껴져서 할 수 있다는 허영은 가득하지만 사실은 아무 자신도 없는 사람이 된다. 더 이상 그런 사람으로 사는 건 안 되겠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쁘지가 않아서,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쏟을 체력을 뾰족해지지 않는데 조금 나눠 쓰기로 했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새로 이사한 집에 바로 가는 대신에, 내가 평생을 살았던 동네로 향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솟구쳤다. 누가 보면 정말 엉뚱한 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걸로 보이겠지,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겠지. 차가 끊길 수도 있는데, 하루 일과로 심신이 지쳤는데도, 기어이 그 동네에 가다니. 그렇지만 매일 밥을 주던 고양이가 보고 싶었다. 그 동네도 보고 싶었고. 그 고양이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쓸모 있어 보이는 일을 할 때보다 행복했으니까. 한 여름이 되기 직전, 밤의 날씨는 적당히 서늘했고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재개발로 모두가 떠나 텅 빈 주택가의 귀퉁이에서 무심하게 누워있는 그 고양이를 만났다. 나는 신나서 얼른 간식을 꺼냈고 고양이는 내 종아리에 몸을 비볐다. 그 녀석을 실컷 만져주고 혹시 다음에 오면 만나지 못할까 봐 한 움큼 더 먹을 것을 놔주고, 정말 차가 끊길까 봐 얼른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보기만 해도 좋은, 내가 자란 동네의 풍경을 가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일 없고, 내가 그렇게 한다고 돈을 벌 수도, 누군가가 날 부러워하지도 않을 그 시간이 온전히 기뻤다. 내 마음이 다시 커다란 원이 돼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할 일은 놓쳐도 아래의 일들은 놓치지 말 것.

가령 글을 쓰는 일. 누구에게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쓰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것을 하는 것. 내가 본 제일 좋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더 단순한 사람이 되는 일.

가령 굳이 길을 돌아가는 일. 가장 빠른 길로 얼른 가지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는 일. 그러다 마음을 빼앗기는 가게나 풍경, 사람들의 어떤 순간을 만나는 것. 누군가는 갸웃거리며 저게 뭐가?라고 할 그림들을 마음 깊이 껴안는 일.

이런 것들을 할 겨를 없이 뭔가를 해나가는 시간들로 내 일상이 팽창해버릴 때, 과감히 그 일상을 나와서 쓸데없는 짓을 맘껏 하는 여전히 순하고 기쁜 사람이기를.


지금 내가 버거워하는 일들도, 저 위의 일들처럼 쓸데없지만 가슴 뛰는 일일 때가 있었다. 내가 그 일들로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니까, 그 일들은 쓸모 있지만 가슴 뛰지 않는 일이 되려고 한다. 가슴 뛰는 일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누군가 지금 무얼 하고 있냐고 물으면 울지 않고, 화내지 않고, 웃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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