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유치원에 다닐 때는 유난히 멜로디언 불 일이 많았다. 그때는 재롱잔치 준비가 가장 큰 행사였으니까. 나는 멜로디언 부는 일이 퍽 재미있었다. 집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을 손으로 힘껏 건반을 누르며 후후 숨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집에서는 건반 위의 손을 이리저리 꽤 빨리 옮겨가며 잘도 쳤는데, 유치원에서 다 같이 연주할 때가 되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빠른 곁눈질로 주위 아이들을 훔쳐보면 나 같이 건반 위의 손가락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아이 없이 연주에 집중하며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합주할 때는 숨을 불어넣지 않고 손가락만 이리저리 옮기며 제대로 치고 있는 척했다.
점점 커가면서도 나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당황할 일이 많았다. 건반을 제대로 누르는 척을 하기도 어렵게 도태돼 있는 것이 들켜버리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남들보다 빠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진로선택의 순간이었다. 16살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 누구와 비교하는지도 모르면서 훨씬 빠르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빨리 선택했으니 이 이후의 모든 것들이 남들보다 빠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나는 빠른 사람이 아니었고, 가장 큰 비극은 내가 빠른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라, 느린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나는 나의 속도에 안도하며 우쭐했지만, 대학 안에서야 말로 정말 빠른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내가 생각하느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을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나는 그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혈안이 됐다. 생각해 보면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가득했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열등감이었다. 늘 속도의 문제라기보다 내 노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빠른 사람들과 협업을 할 때면 그들의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에 비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니까 유치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주위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은 다 멜로디언을 잘 불고 있는데 나만 계속 틀리는 것 같아서 내 손을 두들겨 패서라도 빨리 치게 만들고 싶은 심정으로 대학을 다녔다.
사실 이렇게 속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 때문이다. 몇몇 사람과 함께 일적인 대화를 하는데,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는데 이미 사람들은 그 이후의 이야기로 넘어가 척척 해내고 있었다. 빨리 쫓아가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그러자 아주 오랜만에 대학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초조함과 그 시절 늘 갖고 다녔던 나에 대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에게 실망하면 안 되는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따라가는 건데 오해하면 어떡하지? 나는 결국 이 모양인 사람인 건가? 나는 왜, 나는 왜-
그다음 날 까지도 어제의 찝찝함이 남아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그들처럼 빨리 할 수 있었을까를 곱씹다가 결국 이 생각에 도달했다. 내 속도와 그들의 속도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노력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라고. 이전에 비슷한 초조함이 마음에 일이 일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은 핑계일 뿐이라고 다그치며 수치스러워하다가 끝이 났었으니까.
이 일을 이렇게 글로 까지 옮기게 된 이유는, 내가 ‘느린 사람’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자유 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알게 됐다.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훨씬 큰 자유가 온 다는 것을. 그러자, 대학 때 내가 왜 그렇게 쉽게 어려운 마음이 됐는지, 왜 늘 조바심에 전전긍긍했는지가 이해됐고, 스스로에 대해 심한 판단을 내렸던 모든 순간들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 급했던 마음이 속도를 늦추며, 그래- 나는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되뇔 수 있었고, 멜로디언을 치는 척하지 않을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이제 멜로디언에 숨을 불어넣고 싶다. 그리고 합주 연습을 망치더라도 본 공연은 망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건반을 눌러 갈 것이다.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