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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일구 Dec 17. 2024

음악 속에서 마주한 두 거장

정경화, 라두 루푸 <Debussy, Franck, Chausson>

Debussy, Franck: Violin Sonatas / Chausson: Poeme |  Decca, 1998

지금은 표준처럼 자리 잡은 음반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음악이 담겨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보법부터 다른 두 사람의 듀오 연주를 듣고 있으면, 주변 공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라두 루푸(Radu Lupu, 1945-2022)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피아니스트였다. 루푸의 연주는 섬세한 색채로 가득했고, 시적이면서도 깊은 내면을 드러냈다. 특히 그의 음악은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알프레드 브렌델은 “라두 루푸는 소리로 철학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조성진은 “하늘에서 신이 치고 있는 듯했다”며 그의 연주를 묘사했다. 한편, 루푸는 화려한 경력을 과시하거나 대중의 관심을 끌기보다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1996년 이후 녹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2019년, 그는 '최상의 상태에서 연주를 할 수 없다면 무대에 설 이유가 없다'고 말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는 한국 클래식 음악의 세계 진출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녀는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았고, 카네기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유수의 무대에서 공연했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독창적인 해석, 섬세한 표현력과 감정의 깊이까지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는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흔치 않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정경화와의 협연을 "놀라운 예술적 경험"이라 했고,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자벨 파우스트는 그녀의 연주를 "탁월한 기법과 감정의 풍부함을 동시에 지닌 예술"이라 말했다.


"프랑크 소나타는 젊을 때 라두 루푸와도 녹음했는데, 당시의 기억은 끔찍해서 생각하기 싫다. 루푸의 연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와 하려니 주눅이 들고 활도 떨리더라. 기를 쓰고 만들어냈다." -정경화


1980년, 이런 두 사람이 만나 프랑크와 드뷔시의 소나타를 녹음했다.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는 루푸의 연주에 주눅이 들었다고 회상했지만, 두 사람이 연주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대등하다. 이들이 음악으로 나누는 대화는 마치 무협지에서 고수 두 명이 서로 합을 겨루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각자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해치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살벌하지만 단 한순간도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러나 따라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는, 연주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끊임없이 소리를 주고받으며 얽히는 구조 속에서, 한쪽의 해석만으로는 곡 전체를 이끌어가기 어렵다. 또한 선율은 1악장에서 4악장까지 이어지며 끝없이 순환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정경화와 루푸는 이 곡에 담긴 감정의 소용돌이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한 음 한 음이 깊고 강렬하다. 음반에서 프랑크 소나타의 1악장을 들었을 때, 감정적으로 너무 앞서간 해석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두 연주자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대단했다. 2악장과 3악장에서 점차 고조된 감정과 음악은 4악장에서 절묘하게 화합하며 견고하게 마무리된다.


이 음반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드뷔시의 소나타를 먼저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프랑크 소나타의 소용돌이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는 두 연주자의 섬세하고 시적인 표현력이 특히 돋보인다. 소리는 더욱 세밀해지고, 긴장감이 흐른다. 라두 루푸는 음악을 완전히 내면화한 뒤, 그 소리를 꺼내는 음악가다. 정경화는 확신에 찬 깊고 풍부한 소리를 지닌 바이올리니스트다. 두 사람의 소리는 드뷔시의 서정적이고 색채감 넘치며 고유한 음악 언어가 녹아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자유롭게 어우러진다. 프랑크는 치명적이고 강렬하며, 드뷔시는 신비롭고 감동적이다.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담긴 선물은 에르네스트 쇼송(Ernest Chausson, 1855-1899)의 <포엠(Poème)>이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쇼송의 대표작이다. 듣는 사람에게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바이올린 연주자에게는 감성적 깊이와 기술적 도전을 모두 아우르는 어려운 작품이다. 샤를 튀투아가 이끄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정경화의 찬란한 바이올린 소리를 세심하게 뒷받침한다. 다른 연주자가 이 곡을 연주하면, 항상 고요한 호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정경화'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보여주는 풍경은 훨씬 다채롭고 광활하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Essentiol Track | 2번 트랙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FWV 8: II. Allegro - Quasi Lento - Allegro)

두 음악가의 소리를 집중해서 들어보자. 앞의 1분만 들어도 내가 왜 살벌하다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떤 태도로 음악을 대하고 있는지가 소리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피아노는 어둡고 울창한 숲과 같고, 바이올린 소리는 천년이 넘은 나무 같다. 빠른 템포에도 불구하고 음의 전달이 명확하고 프레이징이 뚜렷하게 들린다. 가장 멋진 장면은 중간에 느린 부분에서 악기를 오가면서 연주가 이어지다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다시 빠르게 음악이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도 두 사람의 연주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https://youtu.be/mJ35YB8skOs?si=RizYZFfTP58J2yeo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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