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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일구 Oct 29. 2024

흐린 날에 음악을 입히다

프롤로그


맑은 날, 비 오는 날 그리고 흐린 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은 우리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해가 쨍쨍한 날에는 훌쩍 여행을 떠나 낯선 풍경을 마주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카페에 앉아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기에도 참 좋다. 여름이라면 수영장이나 바다에 몸을 풍덩 담글 수도 있다. 반대로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에는 집에 콕 박혀 넷플릭스를 보거나, 빗소리를 배경으로 책을 읽기에 좋다. 친구를 불러내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할 수도, 울고 싶으면 와락 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이런 것들이 왠지 마땅치 않다.


흐린 날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기보다는, 가만히 머물게 한다. 그리고 내 안의 감정을 은근히 들여다보게 한다. 특히 슬픔과 우울감은 흐린 날에 선명해진다. 다행히도 흐린 날이 영원하지는 않다.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 밤을, 구름이 걷히면 해를, 더욱 흐려지면 비를 데려온다. 어느 쪽으로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흐림 속에 머무르고 싶을 때도 있다.


나와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김신중 사진작가는 ‘흐린 날’이라는 주제를 꺼내자 이렇게 말했다. “흐린 날은 공평해요.” 렌즈로 세상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다운 말이다. 그의 말처럼 흐린 날에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맑은 날에는 태양이 비치는 곳과 그늘진 곳의 대비가 뚜렷하고, 비 오는 날에는 빗속의 바깥과 이를 바라보는 실내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그 모든 구분이 흐려지며, 세상이 조금 더 공평하게 보인다.


이런 흐린 날에 하기 딱 좋은 것이 있다. 음악을 듣는 것이다. 어쩌면 흐린 날은 음악을 필요로 한다. 음악이 흐린 날에 색채를 입혀주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 생각과 감정의 언어이다. 그 언어는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킨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모호함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주고, 무기력함을 충만하게 채워준다. 음악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어떨 때는 가장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각 곡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이야기를 듣는 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받는다. 음악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우리를 안정시켜 준다.



독일 유학, 음악가들의 음반


음악 공부를 위해 독일에서 지낸 기간이 총 6년 정도 된다. 독일은 나에게 살고 싶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공부하고 싶은 나라였다. 특히 클래식 음악을 공부한다면 독일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분명했다. 독일의 주요 극장과 크고 작은 연주홀,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은 언제나 활발히 열렸다. 게다가 학생을 위한 저렴한 공연 티켓은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매주 뛰어난 작곡가들의 음악을 탁월한 해석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독일에서는 하루하루가 대체로 흐린 날이었다. 날씨가 실제로 자주 흐렸지만, 그보다는 내 인생이 흐리다고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입학할 수 있을까? 졸업할 수 있을까? 이 연주를 해낼 수 있을까? 음악가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어두운 표정으로 매일 학교, 집, 짐(Gym), 일식집(아르바이트하던 곳)을 오갔다.


독일 음대는 대체로 학생 수에 비해 연습실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 학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매일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출발해야 연습실을 선점할 수 있었다.(지금은 온라인 예약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먼저 트람(Tram)을 타고 중앙역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산다. 주로 겉에 빵이 딱딱하고 계란이나 햄이 잔뜩 들어간 것이었다. 버스로 갈아탄 후 학교에 도착해 연습실을 예약하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와 사놓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오전 시간은 연습으로 꽉 채웠다. 집과 학교를 오갈 때는 주로 아이팟과 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단순하고 힘들고 무료한 내 하루는 항상 음악에 기대고 의존했다.


그때의 습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흐린 날 아주 신중하게 음반을 고른다. 공원을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우리 집 소파에서 그날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음악가에게 음반 한 장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연주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레퍼토리를 신중하게 구성하고 기획한다. 악보를 통해 작곡가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고민하며, 음과 소리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이런 노력을 알기에 나는 항상 전체 음반을 통째로 듣는 것을 추천한다. 너무 길다고? 듣다가 멈추면 다음번에 멈춘 부분부터 다시 들으면 그만이다.


나는 ‘흐린 날에 음악을 입히다’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음반을 추천하려 한다.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아끼는 음반들이 될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여러 형태를 띠고 있다. 솔로, 듀오, 실내악, 성악, 오케스트라까지. 나는 이 형태들을 골고루 소개하고 싶다. 하나하나 듣다 보면 분명 당신의 마음과 맞닿는, 평생 곁에 두어도 좋을 음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음악들은 결코 한 번만 듣기 힘들 것이다. 김신중 사진작가는 각 음반에 어울리는 사진을 공개해 줄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여러분의 흐린 날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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