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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밥 먹는 것을 싫어했다

외모 강박증

by 양다경

나는 이모 쪽으로도 그렇고, 고모 쪽으로도 그렇고, 친척들의 작은 얼굴과 단아한 외모에 비해 체격이 컸다. 다들 왜소한 편이었는데 나만 통통한 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뚱보로 느껴질 만큼 눈총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눈총을 받는다는 것을 친척뿐만 아니라, 엄마도 주는 것이라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건 내가 사춘기 무렵, "너의 통통한 모습이 달갑지 않다"라고 엄마가 직접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노골적으로 식사량을 한정시켰다.


사실 꼬꼬마일 때, 아득한 기억 너머 엄마는 통통한 내 모습을 싫어한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친척들이 나를 놀리면 그걸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니라 동조하며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나는 그때 뭔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왜 내가 웃음거리가 되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잘 먹는다,라는 표현 뒤에는 외모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 평가로 넘어갔다. 거기엔 마른 모습이 더 좋고 예쁘다,라는 개념으로까지 이어졌기에. 어리기 때문에 항변도 할 수 없었고, 마냥 운다고 주위에서 그만둘 일도 아니라는 것을. 그 어린 시절에도 무의식을 타고 뇌리에 박혔다.


아무튼 내가 많은 친척과 지척에 살면서 외모를 평가받는다는 것은 큰 우울감을 초래하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엄마의 음식 제한은 사춘기 시절, 식욕이 있던 나에겐 모멸감을 덧붙이는 꼴이 되었고. 하물며 나의 어떤 투정이나 성장기에 생겨나는 말대꾸 자체를 엄마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냥 공포에 가까운 음식 줄이기로 가고 있었고, 급기야 내가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반찬이 냉장고로 직행했다. 또 내 몸무게에 무섭게 집착했던 엄마는 뜬금없이 저울을 들고 나와, 내 무게를 측량하게 만들었다. 그건 친척들이 방문하거나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나의 체격을 탓했고, "살이 안 빠지는 쪽이니까 그래, 그렇다"며 같이 핀잔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그때도 조금씩 미모에 가치관이 변하고, 미모에 다들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이 도래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칼라 TV로 예쁜 연예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그 소녀 시절, 일기에 늘 절망의 글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지 않다는 둥에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글들로 도배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친척들처럼 마른 체격으로 가기에도 나는 여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식사량을 줄이니 더욱 음식에 집착하는 성향으로 흐른 것이다. 책상 서랍, 옷장에 음식을 숨겨두고 급기야 엄마 몰래 먹기 시작했다.


한 번은 악에 받친 것일까,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뺀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의 기준점은 달랐다. 친척들의 야리야리한 몸매에 비해 나는 구조적으로 뼈대가 좀 있는 편이라 마르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모는 165 정도의 키에 50킬로가 안 되는 정도였으니, 내가 같은 키로 50킬로 중반까지 성공을 해도 엄마의 기준에선 뚱뚱한 것이었다. 그런 의식으로 가득 찬 엄마를 내가 어떻게 생각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엄마의 모든 행동은 정당한 것처럼 전달되었다. "많이 먹어",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예쁘다, 우리 딸" 이란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오빠나 아버지도 엄마의 행동에 마치 힘을 실어주듯 '돼지'라는 별명을 서슴지 않고 부르고 놀렸다. 그건 그만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나는 어디론가 내 모습을 감추고 싶을 만큼 억울한 정도였다.

​나중에 엄마의 그 음식에 대한 제한 강박증은 냉장고에 소시지나 고기가 있으면 오빠 몫이니 건들지 마라,라는 명령하는 식으로까지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늘 배고팠다. 밖에서는 작은 용돈으로 사 먹기도 했지만, 집에 있을 때면 허기짐과 씨름했다. 그리고 친척들과 만나는 것이 왠지 꺼려졌고, 지금까지도 그때 친척들의 말을 돌이켜보면 우스개 소리였겠지만, 내 외모를 한 단계 낮게 보는 대화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나의 주변도 시시각각 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나이가 들었다. 친척들과의 인연은 어릴 때 다한 것인지 이제는 거의 만날 일이 없다. 그래도 엄마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한 일이 틀리지 않았고, 다 나를 위한 것이라 얘기한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의 관심사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가 적든 많든 보자마자 살이 빠졌나 쪘나, 그것이 첫째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의 호기심은 내가 "괜찮다"로 답하면 30초 만에 끝나버렸다.

​엄마는 과연 어떤 딸을 원했던 것일까, 아니 땐 굴뚝에 돌연변이가 나왔던 것일까, 예쁜 연예인들처럼 마르지 않으면 사회에 딸이 도태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나는 크면서도 외모의 콤플렉스가 트라우마로 남았고, 내적으로 이어져 성격이 밝지 못했다. 다만 글쓰기란 친구가 있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달래주기도 하며 그 시절을 버텨냈다. 그래서 악으로 깡으로 버틴 시간 속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내재된 글의 힘과 마음의 힘을 믿는다. 이제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밝은 색깔의 수를 놓기에도 여념이 없다. 또 두 딸에게 유형의 모든 것을 무시할 순 없지만 무형의 소중함을 더 말하고, 반복적인 트라우마를 남기려 하지 않는다. 사람의 테두리, 외형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여기며. 이쁘다,라는 칭찬은 가지고 있는 관념의 획일성과 상관없다. 누군가와 비교대상으로 놓고 상처를 주기엔 우리네 존재, 그 자체가 너무 빛나기에. 그리고 저마다의 샘솟는 개성으로 이미 사랑받을 에너지를 품었기에. 타고난 외모, 그 한 가지로 평가를 지을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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