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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Feb 25. 2023

딸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다가 내가 행복해졌습니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딸과 친구들은 드디어 각자의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밤새 놀며 뒹굴기'를 시작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걸 '파자마 파티'라고 한다죠? 작년 여름, 급하게 번개형식으로 딸의 친구 대여섯 명의 엄마들이 파자마 파티를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학교 다녀와서 가방만 던지고 친구집에 달려가서 토요일 저녁까지 줄기차게 놀았던 일이 딸에게는 아주 행복한 기억이었나 봅니다. 우리집에서도 파자마 파티를 하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졸라댔습니다. 주말에 쉬기도 바쁜데 나보고 뭘 하라는 말인가 싶어서, 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딴 데 쳐다보고, 다른 말 꺼내하며 빙빙 둘러대기를 몇 달을 했습니다. 하지만 2월 초에 6학년 졸업하면 이제 못 만나는 친구들을 한 번만 불러서 자게 해달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딸의 말에 저의 이기적인 생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그래, 이제 못 만나는 친구들과 한번 찐하게 놀아라. 딸아.


생각해 보니, 제가 지금의 딸 만할 때, 저는 친구들을 집에 잘 부르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몸이 좀 안 좋으셨거든요. 제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엄마는 큰 수술을 했고 이후로도 몸이 편치 않으셨어요. 당시 담임선생님이 저를 꼭 안아주며 어떡하니 불쌍해서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걸 보면 꽤 큰 수술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엄마의 건강 때문에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놀기가 꺼려졌습니다. 제가 우리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놀았던 기억보다 제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자고 왔던 기억이 더 많아요. 그때 우리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맛난 걸 만들어 주셨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내 딸이 나처럼 엄마에 대해 아쉬움을 느껴서는 안되겠네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애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주고 편하게 놀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면 더없이 멋진 엄마가 될 것 같았습니다.


"너희들, 뭐 먹을래? 떡볶이? 치킨? 피자?"

"마라탕"

"마라탕? 그건 집에서 못 먹는데, 다른 거 골라봐."

"마라탕"

"아니, 그럼 배달시켜줘야 하는데, 엄마가 이 동네 마라탕 잘하는 데를 잘 모르네. 다른 거 먹자. 목살구이 어때?"

"아니, 마라탕"


무슨 로봇도 아니고, 마라탕만 내리 세 번을 이야기하는 딸에게 질렸습니다. 동네 마라탕집에 배달을 시켜야 하나 하고 있는데, 구세주와 같이 저희 언니가 팁을 주었습니다. *팡에서 파는 마라소스를 사다가 애들이 좋아하는 각종 야채와 샤브샤브고기, 중국당면, 분모자, 냉동완탕 등등을 사서 몽땅 때려 넣고 팔팔 끓이면 되는데 무슨 고민을 그리하냐 하네요. 오! 그래? 언니 땡큐. 그래도 연습은 한번 해봐야 하니, 언니가 말한 재료들을 사다가 두 주전 토요일에 한솥을 끓여 딸에게 내밀었습니다. 한 입 떠먹고 눈감고 맛을 음미하는 딸의 입술에 집중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 딸은 음, 괜찮네 라며 엄지손가락을 슬쩍 들어 올렸습니다. 앗싸~ 됐다. 한번 더 연습하자. 지난주 토요일에도 딸은 엄지를 올렸습니다. 시판 마라소스가 정말 대박입니다.


게다가 제 정성(?)에 감동했는지, 언니가 아이들에게 디저트로 레몬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하하. 손을 이렇게 덜다니, 언니, 사랑해!


음식이 해결되면 반 이상이 해결된 겁니다. 근데, 나머지 걱정거리가 아직 남아있었죠. 우리 집에 저보다 덩치 큰 세명의 활달한 청소년을 재울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겁니다. 거실에 재우려니 침구가 부족하네요. 밤 12시까지 놀고 차로 각자의 집에 태워다 줄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하룻밤만 남편을 내쫓을 생각도 했는데 둘 다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애들이 신나게 놀다가 뚝 끊고 집에 갈 리가 없고, 밖으로 내쫓을 남편의 숙박비도 꽤 되거든요. 할 수없이 급히 침구를 구매하러 아파트를 나서는데 지나가던 주민 한 명이 우리 아파트에 있는 손님숙소(게스트하우스)가 꽤 괜찮더라는 말을 했어요. 오! 그 방법이 있었구나. 알아보니다행히 아이들이 원하는 날짜가 비어있었습니다. 얼른 예약을 했죠. 이제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어요. 딸과 친구들이 와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네요. 딸 친구들이 온다는데 마치 내 친구들이 오는 것처럼 설렙니다. 몇 주 전부터 끔찍하게 아픈 허리 물리치료도 아침에 일찍 해두고(그래도 움직임은 불편합니다), 음식재료 손질도 진작에 완료하고 아이들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약속한 저녁 6시 반에 도착한 아이들은 제가 만든 엉망진창의 음식을 맛있다고 하며 잘도 먹습니다. 음식 맛보다 친구들과 한밤을 보낸다는 게 좋아서이겠지요.  


디저트까지 맛나게 냠냠 먹고 아이들은 동네 노래방에 갔습니다. 코인노래방으로 가는 길에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발을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꼭 내 친구들 같았습니다. 마치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싱그러운 13살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한껏 노래를 부르고 '인생 네컷' 사진까지 찍은 아이들을 손님숙소로 들여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옛 친구들의 앳된 얼굴이 동동 떠올랐습니다. 자기 전에 안부 문자 몇 자씩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이 내일 아침에 더 행복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도록 엄마인 제가 달려야겠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이들에게 베이컨과 유자드레싱을 곁들인 그린 샐러드, 바나나와 시나몬가루를 올린 프렌치토스트, 블루베리와 잘게 썬 사과를 넣은 요구르트, 그리고 우유 한잔을 내어 놓을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체력이 필요하니 일찍 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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