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과 기분
30살이 되면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싱그러움, 반짝임, 생기 넘치는 활력은 20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줄곧 "나는 스물아홉의 12월 마지막 날이 되면 아마 패닉 상태가 될 거야."라고 말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지인들은 그거 생각보다 괜찮다고, 지금은 겁이 나겠지만 막상 서른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노라고 달래주곤 했다. 실제로 스물아홉의 후반부에는 그저 바빠 눈 앞의 하루하루를 쳐내기에 급급했었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서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정말이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봄 그리고 겨울 / (좌) Анна Хазова / (우) Ricardas Brogys, Unsplash 흔히들 삶을 '계절'에 빗대곤 한다. 각 계절을 대표하는 이미지와 꼭 닮은 인생의 시기들이 있다. 생명의 탄생은 만물이 생동하는 싱그러운 봄에 비유하기 딱 좋다. 봄햇살을 머금고 쑤욱- 올라오는 어린 새싹은 이제 막 눈을 뜬 아기를, 샛노란 개나리는 아장아장 걷는 꼬마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가을은 왠지 모르게 트렌치코트를 입은 분위기 있는 중년이 생각나게 하고, 고요한 겨울 풍경은 황혼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청년의 시기는 어떨까. 단연 여름이 떠오른다. 따가울 만큼 내리쬐는 햇볕 아래 우거진 녹음, 그 사이로 불어오는 덥지만 시원한 바람과 귀가 얼얼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맴맴- 매미소리. 타협을 모르는 듯한 한여름의 강렬한 뜨거움은 젊음의 솟구치는 피와 열정과도 닮았다.
헨리 스콧 튜크, The Promise, 1888 20대 때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설픈 뜨거움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나 자신이 그러하단 걸 가장 많이 깨닫게 되는 경우는 소개팅 자리에서였다. 비슷한 또래의 두 남녀가 만나 서먹서먹한 분위기 가운데 서로 '어른 흉내'를 내며 소꿉장난을 하는 기분이 들었달까.
특히 만남 후 돌아오는 길에, 상대방의 어설픈 말과 제스처에 똑같이 어설프게 반응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 참 사람이 설익었네..'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더랬다. 그땐 왜 그렇게 그 미숙한 모습이 민망했을까. 서른이 되는 건 그렇게 두려워했으면서도 말이다.
*설익다
1. 충분하지 아니하게 익다.
2. 완성되지 못하다.
*유의어: 미숙하다, 어설프다, 설다(익숙하지 못하다. 빈틈이 있고 서투르다.)
설익었다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어떤 성숙의 단계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 어리고 미숙해서 실수도 많고 어설프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여유로움이나 능숙함 따윈 엿볼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며 불안해하는 작은 강아지풀 같은 모습인 게다.
한동안은 그런 상태에 쉽사리 익숙해질 수 없었다. 빨리 노련해지고 싶었고 어떤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처하는 성숙과 완숙의 미를 갖추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상대에게서도 기대했던 것 같다. 나의 부족함을 타인을 통해 채우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의 '설익음'이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엿보이면 이내 초조하고 시시해졌다. 알 수 없는 시절, 알기 힘든 기분이었다.
떫고 쌉싸름한 초여름의 맛
그 풋풋한 설익음은 계절로 치면 초여름을 닮았다. 아직은 여름의 열기를 덜 머금은, 파릇한 풋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떫고 쌉싸름한 맛 말이다.
영국의 화가 헨리 스콧 튜크(Henry Scott Tuke, 1858–1929)는 초여름의 사각사각거리는 설익음을 아름답게 화폭에 담았다. 제목도 참으로 적절하다. <Leafy June>,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한 6월의 어느 여름날이다.
헨리 스콧 튜크, Leafy June, 1909 그의 그림은 두껍고 거친 붓 자국이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금 막 청명하게 찍은 사진 같다. 찰나의 생동감과 그 순간의 온도가 그대로 느껴진달까. 벌겋게 익어버린 소년들의 얼굴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6월의 때 이른 더위는 충분히 캔버스 너머로 전해진다.
그림의 중간에 서 있는 소년은 옷을 벗으려는 걸까, 입으려는 걸까? 붉게 타오르는 볼을 보고 있자면 저 앞의 시원한 강에서 잠깐이라도 열기를 식히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소년은 망설인다. 즉흥적으로 강에 뛰어들어 한바탕 수영을 한 친구 녀석들이 이미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풀숲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너무 늦게 와버렸다.
헨리 스콧 튜크, The Lemon Tree 튜크의 그림은 쨍한 햇빛이 도드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쳐다만 봐도 눈이 시리고, 가만히 서 있으면 피부가 따가워질 것만 같은 그런 햇빛 말이다. 영국 남서부의 항구도시인 팰머스에서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낸 튜크에게, 선글라스 없이는 도저히 눈을 뜨기 힘든 바닷가의 태양광과 이에 반사되어 쉴 틈 없이 반짝이는 물결의 일렁임은 아주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부드럽지만 부서지기 쉬운 햇살의 변화가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강렬한 그 태양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여름 바다'와 '청년의 시기'를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들로 더 유명하다.
헨리 스콧 튜크, August Blue, 1893-1894 항구의 풍경, 바다, 해변, 보트, 고기잡이, 그리고 평화롭게 일광욕을 하거나 낚시하는 소년들.. 튜크는 이러한 소재에 매력을 느꼈다. 아마도 어릴 적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의 행복했던 추억이 크게 영향을 주었으리라. 그는 심지어 보트를 개조하여 그의 아뜰리에, 작업실로 만들고 그곳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그려내기도 한다.
한편 튜크의 평화로운 그림에는 나체의 소년들이 자주 등장한다. 오스카 와일드, 존 싱어 사전트 등의 예술가와 어울렸다는 사실은 그가 동성애 성향을 지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부추기기도 한다.
헨리 스콧 튜크, Boys Bathing 그러나 튜크는 에로틱한 모습으로 그들을 그려내거나 이를 부각하지 않는다. 그림 속에서 여름의 한 순간을 즐기는 천진난만한 소년들의 모습은 오히려 다비드상과 같은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이나 고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우아한 조각상을 닮았다.
그 당시 튜크는 신화 속 인물들에게 매료되어 있었고 때문에 남성의 몸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겼다. 이들을 결코 성적 묘사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 물놀이를 즐기던 자신의 추억을 모델에 투영하여 그려낸 것에 가깝다. 즉, 이상적인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서로 장난을 치며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는 청년의 자유로운 모습을 담아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게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말이다.)
헨리 스콧 튜크, A Cadet on Newporth Beach, near Falmouth with Another Boy in the Sea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찬란하게 빛나는 어느 여름날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봄 햇살보다는 더 뜨겁고, 싸늘한 가을바람보다는 덜 식은 적당한 청춘의 온도를 그려냈달까. 그 여름날은 누군가에겐 그 열기가 한 김 식고 난 과거일 수 있겠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또는 현재 지나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어설픈 열정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어찌 그리 많이도 했던지. 덤벙댄 후 혼자 많이 울고 자책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식당에서 혼밥을 하며 내가 이만큼 자랐노라- 스스로 뿌듯해하던 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이전엔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경험하고 '이젠 인생의 쓴맛, 단맛 다 알겠다'며 어른 흉내를 내던 나 역시도 말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젊음의 기운을 내뿜어 내던, 연약하고 바스라질 듯 희미해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남아있는 시절이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은 덜 무르익어서 조금은 떫고 쌉싸름한 풋내기의 맛이 느껴지던 그때 그 모습. 주먹 가득 모래를 쥐어 봐도 결국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듯이 결코 붙잡을 수도 되돌이킬 수도 없는 시기이기에, 지금의 나는 그 풋풋한 떫음과 텁텁한 쌉싸름함을 튜크의 그림에서라도 마음껏 만끽해보고 있다.
설익음도 미덕이 될 수 있을까?
청년은 노련함을 갈망하고, 노년은 미숙함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아마도 인생 불변의 역설적인 원리일 것이다. 물론 나는 계절로 치자면 아직 여름에 가까운 시절을 지나가고 있지만, 언젠가 그다음 계절이 온다는 것과 그리고 그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인생의 다음 시기를 동경하면서 또 동시에 두려워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 자문해본다. 설익음도 미덕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이전의 나라면 두말할 것 없이 NO 였겠지만, 요즈음은 YES 라고 답하고 싶다. 설익음은, 미숙함과 연약함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그 자체로 투명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상태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존 듀이는 '미성숙함이 곧 어린아이의 가장 큰 성장의 열쇠'라고 했다. 비록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무색한, 그러나 아직은 덜 자란 어른인 '나'는 그 미숙함과 미성숙함을 발판 삼아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제 삶을 기대해보려 한다. 아마 10년 뒤, 20년 뒤, 그리고 50년 뒤에도 난 여전히 '익어가는 중'일 것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완성도 없을 것 같다. 계속해서 탐구하고 탐험해가는 게 바로 삶의 여정이 아닐까.
Boys Bathing 그러니 그다음 계절이 온다 하더라도, 지레 겁먹음으로 작금의 계절의 맛을 놓치지는 말자. 자고로 여름엔 달궈진 뜨거움을, 겨울에는 아찔한 추위를 느껴야 제 맛이다.
그 시기에만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찰나의 풍미를 온전히 즐겨보려 한다. 미숙하기에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려 시도할 것이고, 미성숙하기에 다양한 것을 배우기 위해 자세를 낮추어 볼 테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시기를 잠잠히 준비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지. 언제까지나 여름이 계속되지는 않을 테니까.
긴긴 무더위가 지나고 어느새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날도 올 것이다. 그때는, 그에 딱 알맞은 온도와 영글음으로 잘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Trivia
소설 <시절과 기분>의 표지에 헨리 스콧 튜크의 <Leafy June>이 사용되었다. 글의 첫 번째 소제목은 이 책의 제목을 인용한 것이다.
<Leafy June>을 비롯한 튜크의 그림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몇몇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 속 시간적 배경 역시 초여름이며, 겨울에 스토리가 끝맺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