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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Aug 02. 2020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뒷모습에게

팀 아이텔, 현대인의 사색하는 뒷모습을 그려낸 화가

20살 어느 밤에 보았던 뒷모습


  '죄수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수능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재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바로 그 '죄수생'의 신분(?)을 한때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Untitled(Part), 2011

  20살. 캠퍼스의 봄을 만끽하고 있어야 할 꽃 다운 시절에, 경기도의 어느 기숙학원으로 향했다. 힘들 거란 건 알았지만 그곳에서 1년 동안 다시 바짝 공부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경영학과라니.. 지금 생각해도 성향과 너무나 맞지 않는 곳인데 그땐 꼭 가고 싶었고 1년을 더 공부하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큰 맘먹고 들어간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가득했다. 다들 아깝게 한 두 문제 차이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제법 독기가 오른, 한편으론 난 실패자야 하는 좌절감과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진 '죄수생'들이었다.


  스파르타 식의 기숙학원이기도 했고, 다들 이번엔 꼭 성공하리라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린 말 그대로 '하루 종일' 공부했다. 잘 짜인 스케쥴에 따라 6시 기상, 아침 체조, 식사, 공부, 식사, 공부.. 전화도 외출도 없이 매일 같이 똑같은, 치열한 일상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불만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우리에게 숨통이 트이도록 허락된 시간은 야간자습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어두컴컴함 가운데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 짧은 5분뿐이었다.


Untitled, 2002

  학원 본관에서 기숙사로 가는 동안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공부에서 벗어나, 재수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허공을 맴도는 게 보였다. 꿈꾸는 미래를 향한 희망,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저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간절함.. 내 앞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흐릿한 뒷모습에서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론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현대인의 뒷모습을 담은 화가


(좌) Mountains, 2018  /  (우) Open Circle, 2017

  독일의 화가 팀 아이텔(Tim Eitel, 1971~)의 그림에는 유독 '뒷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사람, 고개 숙인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 무언가를 바라보며 몰입하는 듯한 사람.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관객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여긴 어딜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뒷모습만 보여주는 걸까.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가 아무것도 없기에 작품 앞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윽고 자신도 모르게 그림의 톤 앤 매너에 물들어간다. 그림 속 인물과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고 자신을 그에게 대입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Red and Blue, 2002


  팀 아이텔은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화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꽤나 심오한 부분이 많다. 인간 내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가 그려낸 뒷모습에서는 고독, 쓸쓸함, 우울과 같은 감정들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그런 것만을 표현한 작품은 아니다. 우리 일상의 가깝고도 먼 타인, 낯설지만 익숙한 타자화된 나를 다시 돌아보자는 철학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가깝다. 이는 작품 활동 초기에 노숙자, 버려진 물건들을 화폭에 주로 담았던 화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다.


  작품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나 저와 같은 뒷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나 자신의 뒷모습을 그림을 통해 만나는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보면 볼수록 생각에 잠기고 내면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관객들은 그림 속 인물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그 인물과 같은 장소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론 누군가와 마주 보는 것보다 그를 등 뒤에서 볼 때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팀 아이텔





구상과 추상 사이, 사색하는 회화


팀 아이텔(Tim Eitel)이 자신의 그림 <Seated Figure>을 바라보고 있다. 음.. 닮았다.


  약 50세의 비교적 젊은 작가인 팀 아이텔은 독일 예술계를 이끌던 라이프치히 사조를 새롭게 재해석한 신 라이프치히 소속의 화가다. 신 라이프치히 화가들은 전통적인 회화 양식의 맥을 잇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며 인간 내면을 치밀하게 표현해낸다. 아이텔 역시 동독의 구상회화와 서독의 추상회화를 접목한 독특한 화풍을 펼치고 있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간단히 풀어 설명하자면, 형태가 없는 '추상'과 형태가 있는 '구상'이 그의 그림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좌) Conversation, 2018  /  (우) White Walls, 2018

  그는 이런 말로 자신의 그림을 설명한다. "나의 그림에서 사람(구상)을 빼면 추상만 남는다." 실제로 그의 그림들에서 한 명 한 명 사람들을 제하여 보면 색의 나열, 공간의 분할만이 남는다. 사람이 있을 때는 벽처럼 보이던 것이, 사람이 없어지면 분할된 면으로 바뀌는 걸 확연히 알아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 방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실제 자신이 찍은 사진에서 작품에 필요한 등장인물, 요소 등을 해체하고 추출하여 단순화된 공간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아래의 <Architectural Studies>라는 그림의 경우, 공원에 앉아 있던 어떤 여인을 찍은 사진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자세와 아우라에 매료되어 미술관인지 박물관인지 모를 장소에 그녀를 옮겨 놓은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배경과 정체불명의(?) 인물이 함께 있는 그의 작품은 관객의 호기심과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Architectural Studies, 2017


사람은 혼자 외롭게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된다.
이것은 고립이 아니다.



  건조한 추상적 배경은 특정 공간이 아니기에 어디라도 될 수 있다. 그 안에 배치된 불특정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니기에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즉 그림 속 장면이 지금, 여기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모호한 이 경계 가운데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꿰뚫고 있는 핵심 주제는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내면'이다. 아이텔은 이를 통해 '사색의 순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고립이 아닌 고독을 다루고 있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팀 아이텔의 그림은 그래서 '사색하는 회화'라고 불리고 있다.



현대인의 사색의 순간


Untitled(Breath),2009

  매일매일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잠깐 짬 내어 쉬어가는 시간조차 부족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사색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를 한번 가늠해본다. 제 자신의 삶만 들여다봐도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 일만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해놓고선 일이 끝나면 그다음 일을 시작한다. 오늘은 수고했으니 저녁엔 정말 푹 잠들어야지, 하면서 흥미를 끄는 새로운 것에 눈과 마음을 빼앗긴다. 쉬어도 제대로 쉬는 게 아닌 것 같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은 점점 더 부족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잠깐 끄고, 사람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잠잠히 생각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팀 아이텔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이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 때리는 중'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뇌과학자들은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휴식을 취하며 최고의 창의성과 생산력을 낸다'라고 말한다. 다시 달려가기 위해, 내일의 새로운 하루를 잘 맞이하기 위해 오늘의 사색이 꼭 필요하다는 거다.


Blue Bag, 2017

  이따금씩 20살의 어느 밤에 보았던 뒷모습들을 떠올린다. 몇 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도 생각이 너무 많아 축 쳐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던 그 뒷모습들을.. 지금 나의 뒷모습은 너무 바빠 보이지는 않는지, 이것 저것 다 해내려 허둥지둥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늠해보며. 길을 가다 문득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뭇잎의 색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줄 아는 뒷모습을 갖고 싶다. 앞만 보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발걸음보다는 생각에 잠겨 발을 지익- 끌며 한 템포 천천히 걷는 발걸음을 닮았으면 한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내일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할 줄 아는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독일의 어느 화가의 그림 속 사색하는 뒷모습이 나의 뒷모습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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